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유산 전달자
유산 전달자
  • 홍기확
  • 승인 2013.04.19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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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1>

이어령의 책, 『느껴야 움직인다.』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도시락을 싸가는 고학년이 되자 아이의 가슴은 부풀었지요. 기다리던 점심시간, 부러웠던 언니들처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것은 새까만 꽁보리밥, 흰 쌀밥 도시락들 사이의 깜깜한 밥. 아이는 부끄러워 교실을 빠져나와 뒷마당에 숨었습니다.
어머니는 왜 도시락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으셨지만 그저 배가 아파서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이제는 꽁보리밥이라도 창피할 것 없다고
다음날 점심, 아이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보세요.
이번에는 보리밥이 아니라 진주알처럼 하얀 쌀밥.

‘아, 엄니!’

이제는 눈물이 나 작은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도시락 뚜껑을 덮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날도 물으셨지요. 왜 도시락을 먹지 않고 그냥 왔냐고. 아이는 또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려다가 엄마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지요.

다 알아요. 어머니도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렸지요.

비가 와야 무지개가 뜬다고 하더니만
눈물이 무지개가 된다고 하더니만
정말 먹지 못한 도시락을 사이에 두고
슬프고 슬픈데도 행복했어요.”

보통 이런 식이다.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애틋하다.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약하다. 즉, 극적으로 위대하고 충분히 감성적인 존재다. 게다가 세상의 아버지들보다는 어머니들이 평균적으로 모성애, 육아기술, 참을성, 배려심 등의 능력치가 훨씬 높다. 물론 자식들에게 밥까지 준다.
반면 아버지는 아주 죽어라 잘하지 않는 한 자식의 인생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가 힘들다. 게다가 밥도 못하거나 안 한다. 또한 엄한 아버지는 가끔, 드물게 감동을 선사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수시, 때때로 감동을 선사한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사회적 약자다.
『느껴야 움직인다.』를 읽으면서 느꼈다. 죄다 어머니 얘기이고 아버지 얘기는 단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 얘기에 나오는 세상에 드문 멋진 아버지가 되기에 나는 멀었다. 약해 빠진 가부장(家父長), 이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나는 아이에게 사근사근한 엄마의 모습과, 엄하지만 인자한 아빠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며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간 힘들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 할 것도 같다. 사근사근한 것은 아내 쪽이 훨씬 낫다. 엄한 것은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하지만 분노의 감정이 섞여버려 냉정을 유지하며 혼내기가 힘들다. 인자한 모습은 일관되지 않아 방임과 허용의 경계를 오락가락 한다.
퍽이나 우습다. 휙휙 달리는 것 같은데 항상 보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중력 때문인지 뛰면 쭉 가라앉고, 허리에는 고무줄을 둘렀는지 한참 달린 후 멈춰보면 당겨져서 제자리로 온다. 딴에는 아이를 키우며 난다 긴다 해봤는데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저절로 “부모”가 되지 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이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밥상을 최초로 엎었다. 아침부터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보며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가 밥상을 엎는 걸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밥상을 엎었고, 우리 가족의 역사에 불명예스런 “최초” 사건을 만들어냈다.
우리 아버지도 한 성깔 하는데 나를 키우면서 잘 참아내셨다. 어렸을 적 나를 돌이켜 보면 내 아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다. 올 해 목표인 “사람 되기”에 집중해야 한다.
수필가로 등단한 문예잡지를 부모님께 보내면서 아버지에게 주는 책에 쓴 글귀가 있다.

“항상 참고 기다려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할 때는 부자가 함께 웃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물할 때는 부자가 함께 운다는 말이 있다. 내가 과연 아들의 선물을 받을 때 “항상 참고 기다려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몇 십 년 후에 들을 수 있을까?
밥상을 엎은 날 저녁, 일찍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나를 보자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이를 꼭 껴안아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나는 하루 종일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사과를 했는데 아이는 단 1분 만에 풀어져서는 놀자고 장난을 걸어온다.
참 고마운 일이고, 고마운 아이다.

가부장(家父長) 아빠. 주부(主婦) 엄마. 이 단어들에 대해 남녀평등이니 뭔지를 떠나, 뜻으로만 보면 집에는 대장이 두 명 있는 셈이다. 대장이 두 명인 조직은 없다. 당신이 대장 하세요. 우선은.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노력만으로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무조건 좋은 아빠가 된 바로 그 시점부터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일까? 노력은 하는 데 내 명함과 아이의 머리에 “좋은 아빠”라는 한 줄을 적기가 꽤나 힘이 든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부자(富者)는 망해도 3대까지 간다고 한다. 아버지는 1대 부자, 나는 2대 부자, 내 아이는 3대 부자. 내 재산을 늘리진 못하더라도 아버지의 유산마저 탕진해서 내 아이가 가난해지는 건 참기 힘든 일이다. 적어도 내가 받은 아버지의 유산만큼은 내 아이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
나는 유산 전달자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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