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도 방학이 필요하다
어른에게도 방학이 필요하다
  • 홍기확
  • 승인 2013.04.15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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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

방학은 참 멋진 발명품이다. 비록 수혜계층이 넓지 않고 수혜시기도 길지 않지만 어른이 발명한 것 치고는 썩 괜찮은 발명품이다.
초중고를 나온다면 봄, 여름, 겨울방학, 이렇게 1년에 세 번, 12년의 교육동안 총 36번의 방학이 있다. 하지만 부모에게 어린 학생의 방학은 골치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재앙이다. 조금 더 자란 청소년들의 방학도 마찬가지다. 청소년들은 놀 곳이 마땅치 않고, 부족하기까지 하다. 정치적인 얘기는 하기 싫지만 정책(?)의 문제다. 아이나 청소년들을 키우는 어른에게도 방학이 필요하다. 같이 놀게 해주세요.

물론 어른에게도 365일 중 코딱찌 만한 방학이 있다. 후벼 파서 휙 튕겨버리면 사라진다. 게다가 제일 더울 때. 왜 하필 여름에 쉴까?
나는 휴가를 가을에 간다. 가을이 놀기가 제일 좋다. 그다지 덥지도 춥지도 않을 뿐더러 왠지 뿌듯하다. 왜냐고? 우리나라에는 봄, 여름, 겨울 방학은 있어도 가을방학은 없으니까! 초중고 방학 때도, 사회에 나와도 가을에 쉬는 것은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잘 하지 않는다. 나는 지구인들과 엇박자로 살고, 걷는 것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엇박자로 지구인들 틈에 몰래 끼어 사는 종족이 있다. 그룹 『가을방학』이다. 그룹명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내가 가진 것을 잠시나마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다. 아내가 좋아하는 이들의 노래 『속아도 꿈결』의 가사도 선의의 인류애를 불식시킨다. 특히나 그룹에서 작사 및 작곡을 하는 정바비라는 사람은 나와 동갑인데 선의의 경쟁자로 낙점했다. 만만치 않은 적수다. 전체 가사를 음미해본다.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 이를테면 <봉별기>의 마지막 장처럼”

방학을 갖고 싶다. 몇 달 동안 동떨어져 엉뚱한 짓을 하고 싶다. 학생들 입장에서 본업은 학업(學業)이다. 이것을 놓는 걸 “방학(放學)”이라 한다. 어른의 입장에서 본업은 일 또는 사업이다. 이것을 놓으면 조금 무섭다. 실업(失業), 태업(怠業), 휴업(休業), 폐업(閉業)이 된다. 방업(放業), 방사업(放事業)이란 말은 없다.
그렇지만 어른에게도 방학은 필요하다. 학생들이 여름에 덥다고, 겨울에 춥다고 공부를 못해서 방학을 준다. 어른은? 여름엔 더워서 일 못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일 못하겠다. 방학을 달라!

방학은 성장기반이다. 하지만 같은 날짜에, 같은 사람들이 동시에 쉰다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남들에 의해 강제로 쉰다는 건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 나름대로 30대 정중앙 시점, 올해 7월부터 12월까지를 내 인생의 방학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 기간 중 몇 차례의 급성장을 기대하고, 더하여 몇 가지 거룩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스스로 낸 방학숙제다. 피터 박스올이 오랜 기간 연구해서 내 놓은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중 100권을 꼽아 읽어볼 생각이다.
두 번째는 아내에게 줄 방학숙제다. 군대에서 서로 주고받은 수 백 통의 편지를 날짜순으로 정리해 책으로 엮어 볼 생각이다. 결혼한 이후부터 숙원사업이었는데 방학을 활용해 작업해서 결혼기념 9주년인 내년 1월 8일 제출할 예정이다.
세 번째는 부모님에게 보여 줄 방학숙제다. 앞서 첫 번째의 100권의 책을 토양분으로 삼아 아버지를 위한 소설, 『오돌비』의 초안을 완성하려고 한다.
네 번째는 아이와 함께 하는 방학숙제다. 공부를 싫어하지만 내년 초등학교에 가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끌려 다녀야 할 아이를 위해 꽃과 나무, 곤충들을 연구하며 놀 생각이다. 사파리 옷과 채집통, 채집 도구는 이미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 방학이여, 어서 오라.
다섯 번째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줄 방학숙제다. 드럼을 맹렬히 연습해서 내가 가입한 밴드 소속으로 연말에 공연을 할 생각이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우겨서라도 할 예정으로 가장 쉬운 방학숙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 언제나 가슴이 시리고 두근두근하다. 예전에는 할 일 하나하나에 “바쁘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압박이 심했다. 지금은 그런 게 그다지 없다. 왜 그런지는 또 생각을 해야 답이 나올 것 같다.
다만 실마리는 갖고 있다.
가을방학의 『속아도 꿈결』 가사의 마지막 부분에 소설가 이상의 『봉별기』가 나온다. 작사가가 언급한 『봉별기』의 끝장 마지막 줄에서 우선은 실마리를 찾았다.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세상이 나에게 해준 것 하나 없다. 세상에 꿀릴 것 하나 없고, 미안한 마음도 하나 없다. 세상이 나 태어날 때 용돈 준 것 없고, 나 떠나갈 때 노자 줄 리 없다. 세상이 내가 너무 커버렸다고 나에게 방학을 주지 않으면, 내 스스로 방학을 만들어 챙겨먹으면 된다.
방학이 별건가? 엉뚱한 거 하면 방학이지.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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