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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름다운 때가 있다
누구나 아름다운 때가 있다
  • 홍기확
  • 승인 2013.04.0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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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9>

심청전을 생각해 본다. 심청전의 주인공인 심청[沈(=心)淸]은 마음이 맑은 사람이다. 반면 아버지인 심봉사(沈奉士)는 책의 내용으로 보면 마음의 눈이 깊이(沈) 먼 봉사(奉士)이자 몰락한 양반이다. 한편 뺑덕어멈은 유독 한글 이름을 가졌는데, 배은망덕(背恩忘德)을 빨리 발음하여 만든 작가의 장난이 아닌가 싶다.

나는 뺑덕어멈같이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심봉사와 같이 마음의 눈이 먼 사람이었다. 봉사에 대해 거친 편견과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동홍나눔샘 봉사단』은 평안요양원으로 청소, 목욕, 급식봉사를 떠났다. 내 임무는 요양원 청소, 몸 닦아주기, 어르신 급식봉사 및 급식 후 이 닦아주기였다.
이 봉사로 인해 비로소 봉사가 눈을 떴다. 평안요양원은 나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그간 고민했던 질문에 대한 해답도 안겨주었다

청소는 그럭저럭 어려움이 없었다. 워낙 요양원이 깨끗해서 청소할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몸 닦아주기. 나무껍질처럼 마른 손과 얼굴을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어떤 분들은 피부가 살짝만 부딪혀도 피멍이 맺힌다.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작은 충격에도 혈류가 막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급식봉사. 이게 문제였다. 죽처럼 생긴 밥과 잘게 간 반찬들. 치매를 가지고 있어도 거동이 가능하신 분들은 혼자 드셨지만, 하루 종일 누워계시는 분들은 떠 먹여 드리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어렸을 때 밥을 떠먹일 때 흘리거나 토해내면 지저분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었다. 이번에는 대상이 바뀌어 말과 거동을 못하는 80대 어르신에게 밥을 먹여드려야 한다.
역시나 끊임없이 게워내고 흘리고 말이 아니었다. 참고 먹여드리다가 몇 분 후 항복하고 요양사 분들에게 급식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나 가끔 이럴 때가 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칠 때 둘의 마음을 교환하는 것 말이다. 할머니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눈빛으로 “이거 미안하네.”라고 말했고, 나 역시 눈빛으로 할머니에게 “괜찮습니다. 처음이라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눈빛은 미안한 듯이 보였지만 반면 생(生)의 의지로 가득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할머니의 삶에 대한 열정은 백발과 주름진 얼굴과 야윈 몸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세월은 무게가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몇 년을 더 살았는지 말해줄 뿐 아니라, 점점 아름다운 멋을 더해준다.

예전부터 살만한 이유를 찾으며 심각하게 고민했던 질문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난 시작점부터 멀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까?”

사실 최근에는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생각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데 요양원 봉사로 이제 가치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섰다.
분명 사람은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죽음이 언제든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 조급해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음이 편해졌고, 이제는 언제든 찾아올 죽음을 느릿느릿하게 기다리면서 내 삶을 즐기고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을 향해 달릴 필요도 없고, 언제 올까 걱정할 필요도 전혀 없다. 터벅터벅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모신 할머니도 꽃들을 좇던 철부지 어린 시절이 있었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낭만의 젊은 시절이 있었을 테다. 첫 사랑에 가슴 시린 시절도 있었고, 자신의 가족들이 삶을 먼저 마감했을 때 슬펐지만 건강하게 극복했던 풍요롭고 아름답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이처럼 아름답던 때가 있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바로 아름다운 때이다.

처음 요양원에 갔을 때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쳐진 분위기에 우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양원의 할머니들은 놀랍게도 본인들의 삶에 당당했다. 편안하게 밥을 드시고, 이를 닦고, 빨래를 살포시 개고, 친구들과 얘기를 했다. 동네에 편안하게 마실 나오신 것 같았다.
그저 아름다운 때이다. 죽음은 언제든지 온다. 불청객이 아닌 예약손님이다. 게다가 죽음은 평범한 예약손님이 아니다. 항상 각자 인생의 빈 방 하나를 여유로 남겨두어 언제든 들여야 하는 특급 VIP 예약손님이다.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이 이치를 알고 계셨다. 누구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이 분들은 지금이 한창이다. 아름다운 때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때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때는 바로 지금이다. 요양원 어르신들의 태연한 모습은 아름답게 현재를 살라고 하는 격려와 같은 토닥임이었다.
이제 그 격려를 밑바탕으로 나 역시 종착점에 임박해서는 하얀 도화지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고 현재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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