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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으로 만든 새로운 다큐의 가능성
4.3으로 만든 새로운 다큐의 가능성
  • 강성률
  • 승인 2013.04.03 1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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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칼럼] <6> 임흥순 감독의 <비념>

 
임흥순 감독은 미술을 전공한 비주얼 아티스트이다. 때문에 그가 만든 영화는 자의식이 풍부한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는 마치 작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화면 하나하나를 채워 영화를 만든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많은 것을 내포한다. 임흥순이 제주 4.3을 소재로 한 다큐 <비념>에는 기존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난해하고 독창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기존 다큐와는 완전히 변별되는 다큐를 만든 것이다.

<비념>은 “제주에서, 무당 한 사람이 요령(방울)만 흔들며 기원하는 작은 규모의 굿 혹은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작은 규모의 굿”을 칭한다고 한다. 이 영화의 목적 역시 4.3으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해원하고 진혼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지슬>과 목적이 같다. <지슬> 역시 제사 형식을 빌어와 4.3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진혼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데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슬>이 극영화지만, 극(劇), 즉 드라마에 치중하지 않고 장면 장면에 정성을 들인 스타일의 영화라면, <비념>은 인터뷰를 중심으로 한 다큐이지만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보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 사운드와 영상의 불일치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 두 감독 모두 미술을 전공한 이력이 이런 영화를 가능하게 만든 일차적인 요소일 것이다.

<비념>은 4.3을 다룬 <레드 헌트> 시리즈와는 선명히 구분되는 길을 한다. <레드 헌트>는 4.3을 겪은 세대가 그들의 끔찍스런 아픔과 고통을 생생한 육성으로 토하고, 이것을 담아내는 데 치중한다. 그래서 <레드 헌트> 시리즈를 보고 나면 과연 저런 비참한 역사를 계속 묻어두는 것이 정상이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레드 헌트>는 이 역할을 너무도 충실히, 잘 수행했다.

<레드 헌트> 이후 등장할 다큐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답을 <비념>이 제시한다. 미술을 전공한 감독은 다큐를 만들면서도 기존의 관습적인 다큐와는 선명히 결별한다. 인터뷰도 그리 많이 하지 않았고, 감독의 존재도 드러내지 않고, 그 흔한 내레이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간간히 자막만 등장할 뿐, 스크린은 수많은 풍광으로 채워진다. 화면은 수시로 사진처럼 멈추어 있고, 그 위로 인터뷰이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목소리는 화면에서 울리는데, 영상은 풍광을 담고 있다. 이 불균질한 영상과 사운드의 몽타주를 통해 감독은 오히려 강렬한 아픔의 실체에 접근한다. 그들의 아픔은 도저히 형언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운드와 영상이 강하게 부딪치게 해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만든다.

가령 말들이 진흙 속에서 뒹굴고 있는 영상은 사운드를 완전히 지운 채 거의 흑백에 가까운 톤으로 진행되는데, 그 화면에는 기괴한 힘이 있다. 몸이 가려워 말이 뒹구는 것인지,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영화라는 컨텍스트에 들어온 이 텍스트는 4.3의 영혼들에 대한 애절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아니, 그렇게 해석되도록 위치시켜 놓았다. 4.3으로 남편 김봉수를 잃은 강상희 할머니의 방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빈 방에 할머니는 계시지 않고 창문 아래 단정히 갠 이불을 배경으로 오른편에 검은 비닐봉투와 노란 비닐봉투가 있다가 바람에 왼쪽으로 날려 간다. 이때 음악은 높은 단조를 사용해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것 같은) 검은 색과 귤과 삶을 상징하는 (것 같은) 노란 색이 함께 엉켜 뒹굴 때 힘들게 살아온 할머니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 이렇게 감독은 제주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지만 정작 그가 치중한 것은 제주의 내면이었다.

<비념>에서 임흥순은 시선을 ‘제주의 4.3’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는 4.3의 아픔이 현재진행형이며, 일본에도 존재한다고 증명한다. 해서 그는 육지인들이 들어와서 잔혹하게 학살한 4.3과, 육지의 필요성 때문에 육지의 인력이 들어와 짓고 있는 강정의 해군 기지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고 본다. 또 4.3의 엄청난 학살을 피해 오사카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오사카에서 2인 극단을 꾸려 연극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여줄 때, 감독은 사전에 이들을 인터뷰하거나 소개하지 않는다. 그들이 일본말과 조선말로 제주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연극의 한 장면을 불쑥 영화 속에 집어넣는 방식을 고집한다. 그런데 그 서툰 조선말로 제주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연극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아픔과 그들이 살아온 길과 고뇌가 고스란히 보인다. 그들이 얼마나 제주에 가고 싶어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사실 <비념>을 보기 전, 제주 4.3을 다룬 다큐라고 해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미 <레드헌트>라는 걸출한 작품이 있으니 이것을 넘어서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 생각으로 영화를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고쳐 먹었다. 임흥순은 전혀 다른 길을 가면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제주와 일본, 개인이라는 미시와 역사와 사회라는 거시, 사운드와 영상의 몽타주를 통해 거대한 ‘영화 콜라주’를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기이한 아우라가 품어내는 힘이 대단했다. <비념>은 단순히 4.3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다.

 

 <프로필>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주간 <무비위크> 스태프 평론가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집행위원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친일영화>
 <영화는역사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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