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5:55 (화)
비틀거리다
비틀거리다
  • 홍기확
  • 승인 2013.03.04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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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5>

어렸을 적에는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었다.
어설픈 친구들과는 가끔 만났지만 죽마고우 두 명과는 거의 매일 만났다. 이 친구들은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았다. 이들과 얘기하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밑을 보며 걷게 되었고, 친구들의 느긋한 걸음걸이에 보폭을 맞추다 보니 터벅터벅 걷는 습관이 굳어졌다.

부모님의 잔소리 중 하나는 어깨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바짝 들고 걸으라는 거였다. 스무 살 때까지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사람도 나와 사귈 때부터 같은 주문을 걸었다. 원래 부모님보다는 아내가 무서운 거다. 고개를 들고 조금은 뚜벅뚜벅 걷는 걸로 바뀌었다.

작년초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나서는 걸음걸이가 다시 바뀌었다. 비틀거리면서 걷는다. 걷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려졌고, 오랫동안 앉았다 일어나서 걸을 때면 불편한 허리 때문에 휘청거린다. 어제는 영화를 보기 전 맥주를 냉장고에서 가져올 때 휘청거리면서 걸으니 집사람이 걷는 폼이 귀엽다고 말한다. 사고가 긍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랑의 힘인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걷는 모양새가 나쁘게 보이지는 않다니 일단은 안심이다.

수술 전 두 달을 아파했고, 수술 후 한 달을 누워서 쉬었고, 다음 두 달을 운동으로 재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아이를 안거나 업어주지 못했다. 며칠 전 아이가 걷기가 힘들다며 주저앉자 나는 “업어줄까?”라고 물어봤다.
도통 이 녀석은 감을 잡을 수 없다. 어린이 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다. 업어줄까라는 질문에 대한 아이의 답변은 수술 후 1년이 지났음에도 한결같다.

“아빠, 이제는 허리 안 아파?”

아프다, 이 자식아! 그래도 이젠 좀 그만해라.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냐! 배려도 좋지만 그냥 못이기는 척, 모르는 척 해주면 안 되겠니?
청출어람의 수준을 넘어섰다. 우리 부부가 가르쳐 준 배려에 타고난 천성까지 더해져 오히려 부담스런 녀석이 되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쓸만하게 큰 자식의 모습에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일찍 고장 난 몸이 안타깝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내가 업어달라고 하면 업어주었다. 고작 145센티미터쯤 될까 하는 키로 135센티미터인 나를 업어주었다. 반면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아이를 오랫동안 업기가 힘들다. 아이를 업고 오름 하나쯤은 거뜬히 오르던 과거의 영광이 그립다. 얼마나 더 내 등에 아이를 업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초등학교 1학년까지가 목표다. 그때 이후에는 내려놓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세월을 걸어왔다. 어떤 걸음걸이로든 걸어왔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아이를 업고 걸어왔다. 하지만 이제 점점 아이를 내려놓고 걸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이번 주말에는 유난히 아이가 나와 손잡고 걷는 걸 거부하며 잡은 손을 뿌리쳤다. 몇 번이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아이는 미안한지 내 등에서 내려오려 하고, 고사리 같았던 손도 굵어졌는지 맞잡은 손마저 놓으라고 하고 있다. 한 번 더 비틀거리며 걷게 된다.
아이가 딱 스무살이 되면 일찍 결혼시키고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다니자고 했다. 아이는 아이일 뿐 우리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 내 등에서 흘러내리는 아이의 몸과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아이의 손은 왜 이리도 아쉬운 것인지.

뒤뚱거리며 걷는 나를 귀엽다고 해준 집사람에게 감사한다. 그래서 안심한거다. 지금부터는 점차 아내의 활기찬 보폭에 맞추어 걷는 훈련을 해야겠다. 비록 비틀거리더라도.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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