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52 (금)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두손 두발 다 들었다
  • 홍기확
  • 승인 2013.01.30 09:59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1>

아이가 퇴원하고 나선 빨빨거리며 잘도 뛰어다닌다. 주말에는 나와 외출도 하고, 공원 잔디밭에서 깁스한 손을 잡은 채로 술래잡기 놀이도 했다.
어제는 병원에 가서 철심을 박은 팔꿈치를 소독하기 위해 팔에 한 깁스를 열었다. 아이가 자기 팔에 나사 같은 세개의 철심이 박힌 걸 보더니 조금 겁을 먹은 듯 보였다. 나는 농담으로 팔이 다 나을 때가지 강철팔로 잠깐 변신한거라고 얘기해 줬더니 적잖이 안심한 모양이다. 소독을 할 때도 우리나라 일곱 살 어린이 중에 최고로 용감하다고 추켜세워 줬더니 득의만만해서 껄껄 웃는다.
이 녀석의 긍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언제 아팠나 싶다. 응급실에서 뼈를 맞추기 전 아파할 때도, 자기가 운다면 옆에 있는 아기도 같이 울 거라며 꾹 참던 애어른. 이 녀석이 과연 새나라의 어린이일까? 한편으로는 긍정적이고 배려 있는 아이로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어렸을 때 이 친구처럼 긍정적이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의 팔이 부러지는 사고 이전에, 아내는 배에 있는 조직을 2센티미터 정도 제거하는 수술을 했었다. 수술을 한지 2~3주 정도 된 듯 했는데 상처는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 꿰맸던 실밥을 다시 끊어 조직을 드러낸 텅 빈 공간에 소독을 위한 거즈를 대었다. 아이가 아팠을 때 아내도 이미 환자였다. 환자가 환자를 돌본 격이다.
아내도 퍽이나 긍정적이다. 아이의 부러진 팔의 붓기를 빼느라 밤새 30분 간격으로 얼음팩을 바꾸어주었단다. 하지만 저녁에 면회를 가 보면 아이가 웃는 걸 보며 아내도 여유롭게 웃는다. 그리고는 나에게 우리의 아이가 병원에서 생활을 하는 것을 보니 너무나 긍정적이어서 감동을 받았다며, 쑥 자란 아이의 말과 행동에 대해 조잘조잘 얘기해준다. 그러냐? 그런데 너도 긍정적인 걸로 치면 만만치 않거든?
왠지 위축된다. 아직 나는 한참 멀었다.

아버지는 항상 치밀한 계산과 전략적 사고를 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손해 보는 듯이 세상을 살아라.”
기업의 최종 목표는 이윤획득이고,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생물 중에서도 인간은 특히나 이기적인 생명체이다. 그렇다면 손해 보는 듯이 세상을 살았던 나의 아버지는 진화의 흐름을 역행한 지구인일까, 아니면 예상외로 외계인일까? 에라,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는 외계인이라고 치자.
아버지가 외계인이라면 나 역시 그 아들이니 외계인이다. 나는 지구인으로 태어나고 싶었는데! 하지만 요즘 나도 아버지처럼 손해 보는 듯이 인생을 살고 있다. 결국 나도 외계인이 맞을 것이다. 출생의 비밀은 숨기지 못한다.
외계인인 아버지는 장남으로써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처가 식구들까지 시집장가 보내기 위해 매일 새벽 무거운 오토바이를 끌었다. 무한 긍정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에게 이런 상황이 주어지면 어떻게 했을까를 궁금해 하진 않는다. 다만 평생 한 번이라도 나에게 이런 상황이 주어질 수 있을까가 궁금할 뿐이다.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 큰 나무이다.

어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아내는 이미 휴가를 5일이나 쓴 터라 더 이상 회사를 빠지기 힘들어 어머니에게 응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분도 강적이다. 긍정대마왕이다.
시댁식구들과 같이 살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장녀인지라 친동생들이 서울에 돈을 벌러 올라왔을 때는 시댁 한구석에 그들을 들여 놓았다. 빨래는 하루에 몇 번을 했는지 모를 테고 설거지는 그때그때 오는 시동생들을 먹이느라 수십번을 했을 테다. 집청소는 그렇다 쳐도 새벽에 연탄불이 꺼지면 안되니 새벽에 잠도 못자고 불을 갈아줬다.
이렇게 오래고 힘든 세월을 겪어 몸이 닿고, 마음도 생채기가 많아 지금은 슬픈 사람이 되어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내도 놀랄 정도로 아직까지 소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좋은 경치를 보면 과잉반응하는 아내보다 더 큰 감탄사를 내뱉고, 나에게도 너만은 걱정 안한다며 응원의 멘트를 날려준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어머니를 바라보면 더욱 더 위축된다. 세상에는 강적들이 퍽이나 많다.

어느 정도는 세상에, 세상 사람들에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긍정만발 십자포화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내가 졌소. 내가 제일 못났소.
그렇지만 그다지 침울해 할 필요는 없는 듯 하다.
말했지 않은가? 이들은 “강적”이라고.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까칠남→긍정남 2013-01-30 18:08:42
전에는 엄청 까칠했는데,
"근주자적근묵자흑"(近朱者赤近墨者黑,
-착한 사람과 사귀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과 사귀면 악해짐)
이라고 좋은 사람과 지내니 점점 긍정적이게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군요.
게다가 요새는 내가 점점 긍정적이게 되는 것인지,
원래 긍정적인 나의 부분부분을 단순히 "발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헛갈립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긍정적이어서 이득을 보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는 것.
부정적이어서 손해를 보는 부분도 크다는 것 정도입니다.

까칠남->긍정남 2013-01-30 17:54:38
전에는 엄청 까칠했는데,
"근주자적근묵자흑"(近朱者赤近墨者黑,
-착한 사람과 사귀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과 사귀면 악해짐)
이라고 좋은 사람과 지내니 점점 긍정적이게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군요.
게다가 요새는 내가 점점 긍정적이게 되는 것인지,
원래 긍정적인 나의 부분부분을 단순히 "발견"하고 있는 것인지도
헛갈립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긍정적이어서 이득을 보는 부분보다
부정적이어서 손해를 보는 부분이 크다는 것 정도입니다.

긍정의 힘 2013-01-30 16:09:14
아이가 큰 수술을 잘 넘기고 밝아져서 다행이네요.
아니, 다쳤을 때도 이미 밝은 아이였네요.
현명하고 지혜로운 '강적' 가족에 둘러쌓여서 든든하시겠어요^^
가족은 서로 닮는 거니까 홍기확님도 필시 강적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