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없는 여유
끈기 없는 여유
  • 홍기확
  • 승인 2013.01.14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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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8>

도무지 꾸준히 하는 것이 없다.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취미는 손가락으로 꼽자면 모자라고, 흥미는 발가락까지 합쳐도 모자라다. 관심은 오지랖이라는 명사 하나로 표현하기엔 삐칠 정도로 강력한 범위를 자랑하며, 호기심은 증후군이라고 할만큼 병적이다.

도통 잘 하는 것이 없다. 바둑은 동네바둑, 서예는 그럭저럭, 영어는 어물어물, 글쓰기는 횡설수설. 어머니에게 어려서부터 항상 듣던 말. “너는 끈기가 없어. 뭐 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잖니?”

나도 변명은 있다. “내가 뭐 교수될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하면서 재미있게 놀면 되잖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나를 제대로 파악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끈기가 없는 게 맞고, 꾸준히 하는 것도 없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펭귄 하이웨이』는 초등학교 4학년인 아오야마가 주인공이다. 세상 만물에 관심이 많고 항상 연구하며 메모지나 노트에 온갖 것들을 기록한다. 이 친구는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긴다.

뇌를 많이 쓰기 때문에 단 것을 많이 먹음으로써 뇌의 유일한 영양원인 포도당을 공급해주고 있다. 하지만 뇌의 혹사는 피곤을 유발한다. 당연히 졸려서 매일 저녁 이를 닦지 않고 그냥 잔다. 그래서 치과에 자주 간다. 바라는 건 자주 이를 닦을 필요 없는 어른들의 건강한 영구치다.

이 책은 아내가 나에게 강력 추천한 책이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메모 방법이나 주인공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가르침들이 내가 하고 있는 메모나 글쓰기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소설을 좀체 읽지 않는 나는 아내가 추천한 소설책만 읽는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아내다. 게다가 나는 하루하루 역동적이어서 그때마다 적합한 책을 읽어줘야 하는데, 아내는 항상 내 상황에 알맞은 책을 추천해준다.

읽어보니 유쾌하다. 주인공은 사소한 것이라도 '연구'를 한다고 표현한다. 항상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찾아보며 연구하고 친구들과 소소한 토론을 벌인다. 아내의 의중을 알겠다. 내가 꼼지락거리며 하는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는 '연구'이니 계속하라고 말이다. 일종의 응원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아침에는 오전 1시 6분에 일어났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자는 시간은 보통 한결같이 저녁 9시이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12시~7시 사이이다. 잠잔 시간을 계산해봤다. 4시간 정도 잔 셈이다. 충분하다.

잠을 오게 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밤 9시에서 11시에 집중적으로 분비되고, 깊은 잠을 의미하는 논렘(non-Rem) 수면은 잠든 후 3시간에 집중된다.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잠을 잤고, 이불에서 다시 뒹굴데 보았지만 다시 잠이 오지도 않는다. 과학과 나의 신체리듬은 공명(共鳴)하며 나를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것들은 특별할 게 없다. 어제 신문을 들척여보고 앞으로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 잠깐 고민하며 계획도 세워본다. 운동도 깔짝깔짝 해보지만 땀이 나려고 해서 15분 만에 그만둔다. 공부를 시작해 보지만 갑자기 졸음이 와서 당황했다.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순간이다.

공부는 똑같은 책을 7번째 보고 있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는 않은 것 같다. 반쯤은 새롭고 나머지 반쯤만 익숙하다. 고승덕 변호사는 책을 7번 보면 모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제 빌려온 고승덕 변호사의 책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다. 읽지 말아야겠다.

『펭귄 하이웨이』를 읽는다. 그러다가 펭귄의 생태가 궁금해졌다. 고작 60페이지를 읽다가 인터넷을 켜서는 펭귄의 식생을 검색해본다. 펭귄은 6속 18종이며 남극대륙에만 산다. 남극대륙의 겨울은 더 추운데다가 하루 종일 캄캄하다. 그래서 펭귄들은 겨울에 비교적 따뜻한 남극 대륙의 안쪽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이 이동루트를 펭귄 하이웨이라고 한다. 아, 그렇구나.

책을 빨리 읽고 싶다. 이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활자를 읽어 내려가다가 딴 생각이 들면 십분이고 한시간이고 책과 관련 없는 생각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가 많다.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속도보다 머리로 생각하는 속도가 빨라서 그런 걸까? 진지한 고민에 속기사 자격증이 있는 친구에게 속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에 어떻게 타자를 치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나는 글을 쓸 때도 딴 생각을 한다. 글을 쓰는 속도보다 생각하는 속도가 빨라서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도 딴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뭘 쓰고 있었는지 까먹을 때가 많다. 속기는 내 머릿속 생각과 타자의 속도를 비교적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일 듯하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CEO였던 잭 웰치는 어렸을 때 심각한 말더듬이였다고 한다. 당연히 주위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하루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말더듬이라 놀림을 받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엄마의 답변이 멋지다.

“잭, 너는 말더듬이가 아니야. 다만 말을 하는 속도보다 머리로 생각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 뿐이란다.” 내가 잭 웰치는 아니지만 그의 답답했던 마음을 알 듯 하다. 그는 아마도 성인이 되어가면서 머릿속에서 먼저 생각을 정리하고 잽싸게 말로 표현하는 기술을 눈물겹게 노력하여 익혔을 것이다.

나 역시 생각의 속도가 방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끈기도 꾸준함도 없지만 여전히 무언가 이것저것을 꼼지락거리며 하고 있다. 뭐, 내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서 교수할 것도 아니잖은가? 내가 하는 꼼지락거림도 어쨌든 한 개인의 거룩한 연구이다.

1시쯤에 일어나 벌써 7시가 다 되어 간다. 오늘의 일출시간은 7시 38분이다. 나는 새벽을 기다리며 아침을 밝히려 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조급하고 바쁘게 산다. 뭔가를 하면 성과를 내야하고, 그 성과를 평가하며, 손해득실을 따져대려고 한다.

나는 비록 거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은 아니지만 나만의 업적을 세우고 있는 당돌한 일반인이다. 신사임당처럼 유명한 학자를 낳은 어버이는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까불거리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당찬 아빠다. QED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과 같은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는 내놓지 못하였지만, 나름 방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세상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내 가치는 남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을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니잖은가? 게다가 남의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그대로 내 삶이 변하거나, 평가만큼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늘도 나는 정신없이 꼼지락대지만 이런 끈기 없는 여유를 느긋하게 즐긴다. 꽤 쏠쏠하고 재미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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