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도서 1만권 내놓을 계획이지만 공간 없어 애태워
그런데 그는 고향 제주에 올 때마다 기억의 자취를 하나 둘 잃어버린다.
“항상 걸어다녔죠. 그런데 저 집도 바뀌고, 이 집도 바뀌어 있어요. 향수는 아니지만 옛 기억이 없어진다는 게 아쉽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깨진다는 게 아쉽죠. 그래도 전 늘 제주에 올 때마다 옛 도심을 걷고 또 걸어요.”
걷고 또 걸으면 무슨 답이 나올까. 그의 말마따나 그는 ‘향수’에 젖어서, 옛 일을 떠올리기 위해서 걷는 게 아니다. 그에게서 답을 들어본다.
“요즘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내려오고 있죠.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문화로서의 즐길 게 없다는 겁니다. 영화를 예로 들어봅시다. 수많은 영화가 상영되는 듯 하지만 정작 제주에서는 예술영화를 볼 수 없어요. 지역문화의 수준이 떨어지다보니 방법은 하나죠. 서울로 가는 것뿐입니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책을 1만권을 가지고 있어요. 경기도 고양시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젊은층을 겨냥한 도서관을 꾸리겠대요. 사서도 두고 서적구입비도 지원한다는 조건이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양시에 1만권을 줄 필요는 없더군요. 고향이 있잖아요.”
그는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나 ‘영화’ 한 가지에 만족하지 못한다. 와인과 여행과 음식 등이 그의 곁에 있다. 때로는 와인 전문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제격인 그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입국할 때마다 그의 손에는 책이 수십권 달려 들어온다. 영화, 연극, 미술, 음악, 문학 등 인문학적 요소를 지닌 1만권을 제주에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수십명을 만나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이 점찍은 장소는 경로당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바뀌는 걸 싫어한다. 그는 「와인의 문화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가끔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밭 앞에 선다. 1395년 이 지방에 심어진 다른 포도나무들은 뿌리째 뽑히고 단 한 가지 품종, 피노 누아만이 남았다. 지금도 거기에 변화는 없다. 몇 백 년동안 같은 밭에서 같은 나무들로 와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14세기 사람들도 마셨던 와인을 지금 마신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데 나는 뒤를 돌아본다. 미련한 짓일까?”
제주시 옛 도심을 살리는 길은 도심을 뒤엎고 만들어내는 도시개발도 아니고, 탐라문화광장과 같은 대규모의 프로젝트도 필요하지 않다. 옛 도심의 기억이 묻어난 상태에서 곳곳에 문화공간을 심는 일이다. 영화평론가이면서 치열한 독서광이면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혹은 와인 전문가인 고형욱씨가 그리는 제주 옛 도심의 미래이기도 하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제야 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