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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품는 제주의 바람, 물, 그리고 땅
사람을 품는 제주의 바람, 물, 그리고 땅
  • 고희범
  • 승인 2013.01.04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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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29회 제주탐방 후기

'풍수지리' '명당' '음양오행'.

친숙하면서 어색하기도 하고, 잘 알 것 같으면서도 정작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다. "제주도에서 명당은 어디일까?"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풍수지리의 기본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풍수지리사인 안선진 제주관광대 교수의 안내에 따라 가끔씩 눈발이 날리는 체오름을 향해 길을 떠났다.

구좌읍 송당리 체오름. 시멘트 포장 길을 따라 들어가 말굽형 분화구의 터진 목으로 들어섰다. 철쭉과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는 너비 2~3m의 길은 키 작은 풀로 덮여있다. 촉촉하게 젖어 있지만 질척거리지는 않는다. 조금 전까지 불어대던 바람도 사라졌다. 뭔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포근함이 느껴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몸을 감싸는 듯한 느낌. 분화구 입구로 들어서기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이런 기운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주변의 환경 만으로 이런 기운이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체오름은 곡식을 거르는 '체'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삼태기(골체)를 닮기도 해 '골체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체오름의 얼굴에 해당하는 'ㄷ'자형의 분화구가 북동쪽을 향해 터져 있는 말굽형 분화구다. 화구가 워낙 크고 깊어 평지에 분화구가 넓게 펼쳐져 있고 화구벽이 오름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모양새다. 동에서 서를 향해 평지에 나 있는 진입로를 따라 걸어들어가면 바로 분화구 바닥에 이르게 된다.

조금 더 들어가자 분화구 바닥이 넓게 펼쳐지고, 수직에 가깝게 가파른 화구벽이 울창한 숲을 이룬 채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분화구 바닥은 얼핏 보기에도 직경이 500m는 족히 됨직한 데다 화구벽은 50m쯤 되는 높이로 둘러싸고 있어 천연 요새 같은 형상이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했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당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아있다.

 

지름이 500m쯤 되는 넓은 분화구 바닥. 사진 오른쪽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분화구 안쪽에 서 있는 담팔수 한 그루가 눈에 띈다. 나무 아래에 50여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가지를 풍성하게 펼치고 있다. 기품있게 생긴 모습 또한 예사롭지 않다. 안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바람도 막아주고, 땅도 좋은 데다, 땅에 생기까지 있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생기는 나무 동쪽에 혈이 뭉쳐진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분화구 안쪽에 기품있게 생긴 담팔수가 가지를 풍성하게 펼치고 서 있다.

'명당'이란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생기를 머금어야 한다. 물이 풍부하면서도 습도가 적당히 유지돼 습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싫증이 나지 않고 사람이 오래 머물고 싶은 건강한 땅을 말한다. 이런 조건은 음(陰)과 양(陽)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가능하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기본은 산과 물이다. 산은 정지해 있는 것이어서 '음'이고 물은 흘러 움직이는 것이어서 '양'이다. '정'(靜)인 여자는 '음'이고 '동'(動)인 남자는 '양'이다. 음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만나 자손을 얻듯이 산의 음과 물의 양이 조화를 이루어 혈(穴)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삼라만상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풍수지리는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정리한 학문으로, 천지 운행의 기본법칙을 파악해 인체의 생명활동과 자연계 변화의 법칙을 찾아가는 것이다. '풍수'라는 말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藏風得水)는 말에서 유래했다. 사람은 '기'(氣)를 받아야 하는데, 이 '기'라는 것은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추는 것이어서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음으로써 기를 받기 위한 도구가 곧 풍수라는 뜻이다.

이제 체오름을 오를 차례다. 말굽형 분화구의 터진목 오른쪽 사면을 오른다.

 

체오름 화구벽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분화구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오른쪽 능선이다.

분화구를 마주하고 오른쪽으로 뻗은 능선은 나무가 앞을 가리지 않아 화구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안선진 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터진 목을 마주한 화구벽에 봉긋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가 체오름의 주봉인 현무(玄武)다. 현무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흘러내린 맥에도 작은 봉우리 두개가 보인다. 이것이 우백호(右白虎)다. 왼쪽으로 흘러내린 맥은 좌청룡(左靑龍)이다. 우리가 올라온 능선이다.

 

체오름의 주봉인 현무봉. 울창한 숲으로 덮인 채 좌청룡, 우백호의 지맥을 거느리고 있다.
현무봉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지맥인 우백호. 사진 왼쪽 아래 부분에 분화구 진입로가 있다.

분화구 안으로 들어설 때 위 사진 왼쪽 아래 부분의 저 지점에서 느꼈던, 뭔지 알 수 없는 포근한 기운은 "우백호의 가슴 속살"에 해당하는 지점이어서 그렇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체오름의 얼굴에 해당하는 전면 중에서도 생기가 모여있는 가슴 안쪽이라는 것이다.

 

왼쪽으로 뻗은 지맥 좌청룡과 평평한 땅 '당판', 맞은 편에는 우백호의 끝자락이 보인다.

좌청룡의 지맥이 끝나는 지점에는 평평하고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풍수지리학의 전문용어로는 '당판'이라고 한다. 체오름의 주봉인 현무에서 왼쪽으로 뻗어내린 지맥이 체오름을 향해 흘러 들어오는 '구곡수'(九曲水)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평평한 당판을 이룬 것이다. 물을 만나 더 뻗어나가지 못한 생기가 이곳에 머물게 된다.

특히 구곡수는 '갈 지'(之)자나 '검을 현'(玄)자 모양으로 '구불구불 흘러 9번 굽은 물'을 이르는 말로, 매우 귀한 물이다. 여기서 '물'은 지표면을 흐르는 것이 드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수맥이나 물 기운, 비가 오면 물이 흐르는 곳을 모두 포함한다. 안 교수는 "좌청룡의 지맥이 물을 만나 당판을 이룬 것은 체오름의 모든 생기가 좌청룡에 몰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좌청룡의 끝자락에 만들어진 당판. 지맥의 흐름이 물을 만나 잠시 멈춘 이곳은 생기가 넘친다.

이곳 당판에는 많은 생기가 모인다. 맑은 산의 기운과 구곡수가 만나 음양이 조화를 이룬 탓이다. 그래서 안 교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면 산이 등 뒤에서 안아주고 물이 얼굴 앞에서 감아주는 조화를 느낄 수 있다"고 했지만 눈발이 날리는 당판에서 눈을 감고 마음을 모을 여유는 없었다.

체오름에 생기가 많은 이유는 산과 물이 만나 이루는 음양의 조화 외에도, 체오름이 주변 오름의 생기를 모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한라산 동쪽 사면의 지맥 가운데 거슨새미오름에서 체오름으로 생기가 이어진다. 또 안돌오름과 누운오름의 지맥도 체오름으로 흐른다.

 

우백호의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서는 체오름에 생기를 전해주는 안돌오름이 한 눈에 보인다.

주거지인 양택지(陽宅地)와 묘지인 음택지(陰宅地)를 통털어 좋은 땅은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음양이 조화를 이룬 땅이어야 한다. 우선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여야 한다. 좁은 의미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이 좋다. 느낌 만으로도 뒤가 높아 바람을 막아주고 앞이 시원하게 트이는 지형이 좋아보이지 않는가?

산에는 얼굴에 해당하는 전면과 등에 해당하는 배면이 잇다. 완만한 능선과 밝고 부드러운 선을 갖춘 쪽을 산의 얼굴로, 어둡고 험하고 가파른 쪽을 등으로 볼 수 있다. 전면은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배면은 바람을 받기 때문에 춥고 험하다. 좋은 자리는 전면에 있을 법하다.

좋은 터는 생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맥이 연결된 자리여야 한다. 맥이 흐르는 중간 지점이 아니라 마지막 감아도는 지점이어야 한다. 능선 위에는 집이건 묘지건 좋지 않다. 좋은 자리란 능선이 끝나 평탄한 곳을 말한다. 능선의 경사면은 빗물에 흙이 쓸려 내려가게 돼 있어 기초가 무너질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오름의 경사면에 있는 묘. 사진 왼쪽의 묘 2기 사이에 땅이 내려앉은 모습이 보인다.

물길 만을 놓고 보면 물길이 감아도는 안쪽이 얼굴면이고 바깥쪽은 등면이 된다. 물이 감싸는 안쪽은 바람과 물의 흐름이 잔잔해 아늑하고, 반대쪽은 물과 바람의 흐름이 강해서 운기가 흩어진다. 도로는 사람과 차량이 다녀 움직이는 기운이므로 흐르는 물과 같이 '양'으로 해석한다. 도로도 물길과 마찬가지로 감아도는 안쪽이 얼굴면이다.

그러나 수맥이 흐르는 땅은 좋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개는 수맥 위에서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수맥 위에 집을 지을 경우 건물에 세로로 금이 생기고, 인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단백질 합성을 막아 항암 기능을 떨어뜨리고, 칼슘합성을 방해해 골다공증이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건강한 땅이었다 해도 수맥이 생기게 된다. 흐르는 물이 물길을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포장도로를 걸을 때는 바퀴자국이 생긴 곳을 피해 걷는 것이 좋다. 바퀴가 지나다닌 자리에 수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바퀴자국은 비가 내리면 진창길이 돼 당연히 피하게 되지만 땅이 마른 경우도 수맥 위인 것은 마찬가지다.

 

수맥이 흐르는 곳을 피하는 것이 좋다는 설명을 들은 뒤 바퀴자국을 피해 걷는 탐방참가자들.

땅의 모양이나 지세가 기를 모으는 힘이 부족한 경우 땅의 힘을 보충하는 것을 비보풍수(裨補風水)라고 한다. 조천읍 신흥리 주민들은 마을 뒤를 받쳐주는 산이나 오름이 없어 지세가 허한 반면 바다는 마을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어 마을에 재앙과 나쁜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을 앞 바다에 탑을 세웠다.

50년 전 북서쪽 바닷가와 방파제 부근에 탑 2기를 세웠는데 이후 다시 3기를 추가로 세웠다. 북서쪽 탑은 위쪽을 불룩하게 하고 돌을 얹어 양탑으로 해석하고 '오다리탑'이라고 부른다. 방파제 부근 탑은 위쪽을 오목하게 쌓아 음탑으로 해석한다. 탑 위가 오목해 새들이 자주 앉는다고 해서 '생이탑'이라고도 부른다.

 

사진 오른쪽은 양탑인 오다리탑. 방파제에 있는 왼쪽 탑은 음탑인 생이탑.

체오름에서 풍수지리의 기본을 보고, 신흥리 바닷가에서 허한 기운을 보충하는 풍수를 접한 뒤 우리는 사람이 살기 좋은 명당으로 이동했다.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죽성마을. 4.3 때 초토화작전으로 사라진 마을이다. 제주읍 오등리의 자연마을 중 76가호로 가장 인구가 많아 오등리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중산간 마을로 초토화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 30여명은 끌려가 총살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랫마을 오드싱을 중심으로 재건생활을 했지만 죽성은 끝내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일부 올레와 돌담, 집터 뒤의 대나무 등이 남아 있어 마을이 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4.3으로 사라진 중산간마을 죽성. 집터의 흔적을 보여주는 돌담과 대나무.

죽성은 한라산의 얼굴인 북쪽 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생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마을이다. 산지천의 작은 물줄기들이 마을 동쪽을 흐르고 있어 음양의 조화도 뛰어나다. 안선진 교수는 워낙 건강한 땅이어서 마을을 복원해도 좋고, 지금 당장 들어가 살아도 좋은 양택지라고 말한다. 특히 덕흥사 서쪽으로 흐르는 지맥의 생기가 건강하다.

 

죽성마을 안길인 죽성로. 야트막한 돌담과 좁은 길이 어우러져 아늑한 마을의 흔적을 보여준다.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 살아온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을 마땅한 일로 여겼다. 거친 자연환경으로부터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한 지혜도 자연에 기대어 체득했다. 풍수지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어려운 용어와 이론은 접어두고라도 느낌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생기 넘치는 오름을 찾아 오르며 건강한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제주가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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