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0:14 (금)
아이의 신발은 어디로 갔을까?
아이의 신발은 어디로 갔을까?
  • 미디어제주
  • 승인 2012.11.27 14:1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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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시 동홍동 주민센터 홍기확

서귀포시 동홍동 주민센터 홍기확
항상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지극히 평범해서 세상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하지만 특별하게 살고 싶었다. 세상이 모를 지라도 나만의 인생은 지극히 특별하게, 특별했노라고 외치고 싶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에서처럼, 나의 마지막 날에 씨익 웃으면서 “아름다운 이 세상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 아들의 돌 잔치에서도 많은 지인들 앞에서 외쳤던 평범의 추구. 일부분만 소개해본다.

“아빠랑 엄마의 일생일대의 목표는 가정제일주의, 평범제일주의란다. 진취적이지만 평범하게, 남이 부러워할 정도의 풍요가 아닌 우리 셋이 누릴 만큼의 풍요로움으로 살자꾸나.”

하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내 바람과는 달리 나는 나 이외의 가족, 친척, 친구, 직장 동료들과 얽히게 되었고, 적잖이 우울하게 단 한번도 “너는 평범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집사람과 가족이 되었다. 20여년 전에 아무도 내가 이사람의 남편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아이가 생겼다. 이른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대를 잇는 우리 가족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집사람의 현재 직장은 7번째, 나는 5번째. 둘이 도합 12번의 직장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결혼 후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이사는 9번째다. 많은 사람들과 얽히게 되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다고,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자극적인 정도로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나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우선 일반인이 생각하는 평범함의 기준인 다섯 가지 중 “태어났다. 결혼했다. 애를 낳았다. 애를 결혼시켰다. 죽었다.” 중 세 가지나 이루었다. 앞으로 목표는 나머지 두 가지만 이루면 되는데, 마지막의 “죽었다”는 노력 안 해도 되는 목표이니 이젠 한 가지, “애를 결혼시켰다”만 남았다. 매우 행복한 평범한 삶을 80%나 이미 이루었다.

어제 아침, 아이가 늦잠자는 걸 깨우기 힘들어 6살짜리를 집에 혼자 놔두고 직장에 먼저 출근했다. 아이에게는 나가지 말고 방에서 잠자고 있으라고 했는데 30분 후에 집에 와보니 아이의 신발이 없었다! 집안에서 큰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여러 번 외쳤다.

없어진 신발. 공허한 외침. 둘러보던 중 발견한 아이의 점퍼. 내복만 입고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며 동네를 승용차로 빠르게 두 바퀴를 돌았다. 없었다. 어린이집에 갔나 싶어 전화를 했더니 안왔다고 했다. 담임선생님도 아이를 찾아 나섰다.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떡해.”

왠지 앞으로는 평범하게 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눈 하나 깜짝 안한다는 내 기본 가치관에 드디어 중대한 도전이 생긴 것이다.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는 내 강철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이렇게 지루하지만 역동적인 몇 십 분이 지나고, 아파트 자치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밑에 집 아주머니가 내 전화번호를 묻던데 무슨 일 있는 거냐고. 오! 감사합니다! 단서를 얻었다. 아이는 밑에 집 아주머니집에 있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 가보니 역시나 아이는 TV를 시청하시면서 두유를 드시고 계셨다. 격분을 누르며 아이를 데려와 나름대로 냉정을 유지하면서 혼냈다. 상황 종료.

어제 일은 지나갔다. 하지만 어제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이의 없어진 신발을 봤을 때 느꼈던 그 절망감은 평생 갈 것 같다. 있어야 할 자리. 있어야만 할 신발. 얼마나 소중한 신발이었던가. 평범한 삶의 80%는 이미 이루었다. 하지만 나머지 20%가 상당히 힘든 목표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윤흥길 소설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을 보면 가난하지만 항상 아홉 켤레의 구두만은 깨끗이 닦는 권씨라는 사내가 나온다. 권씨는 징역을 살고 나왔다. 아이는 엄마 뱃속에 있고 가난에 찌들었다. 아내는 아프다. 결국 그는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인, 주인공의 집을 털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들키고 만다. 다음날 그는 아홉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사람은 없어지고 구두만 남는다. 아홉 켤레는 그의 자존심이자 놓치고 싶지 않았던 희망의 끈이었다. 그 끈을 놓고 떠난 것이다.

이런 미친! 아이를 찾으면서 이 소설이 떠올랐었다. 그리고 아이를 찾으면 직장을 얻고 내 품을 떠날 때까지 아이의 구두는 내가 직접 닦아주리라 결심했다. 내 아버지가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 항상 내 구두를 닦아줬던 것처럼.

흥청망청 놀던 시절, 내 어머니가 집에 들어와 내가 없을 때 어디 갔느냐고 전화로 물으며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어디니? 집에 와보니 네 신발 없더라?”

아. 신발. 그 때 그 신발. 얼마나 불안하셨을까. 전화라도 미리 해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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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확 2012-11-28 22:52:13
이거...뭐...영광인데요. ^^
아직 진화가 덜 됐는지 인간되려면 먼 것 같아요.
쑥이나 마늘을 싫어하니 단군신화의 방법을 차용할 수는 없고...
항상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잡힐 것 같은데 자꾸 도망가고,
다온 것 같은데 여긴 아니래고.
아직 60여년은 살 날이 더 남았으니,
따뜻한 덧글들을 격려삼아 가끔 글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범한 사람 2012-11-28 15:05:06
벌써 팬이 생긴 것 같네요.

현자는 바보와 같다 2012-11-28 14:34:25
홍기확님의 글은 늘 입가에 미소를 띄게 하는 힘이 있죠..(이러다 팬 생길라^^)
저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글을 보면, 책 읽기를 즐긴다는 걸 알 수 있죠.
책을 넘 좋아하는 저로서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요즘 전 차동엽 신부님의 <바보Zone>을 읽고 있는데..
"늘 손해보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바보처럼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문구가 마음에 다가오더군요..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이 내용과 일맥상통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상에 감사하고 소중한 게 무언지 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 아닐까요.

평범한 사람 2012-11-28 13:44:19
진실이 묻어나는 글입니다. 전에 글을 보고 좋다고 느꼈는데, 이번 글도 일상의 얘기를 너무 자연스럽게 풀어내셨네요.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