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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에 귀먹고 눈멀었다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에 귀먹고 눈멀었다
  • 미디어제주
  • 승인 2012.10.30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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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을 알기에 제작사나 배급사는 영화를 보기 전 기대치를 최대한 낮추기를 청한다.

그런데 정재영(42)과 박시후(34)의 액션 스릴러 ‘내가 살인범이다’는 달랐다. 투자배급사 쇼박스가 처음부터 “기대하라”고 공언한 영화다. 이 영화 바로 전에 액션 ‘회사원’(감독 임상윤)을 ‘제2의 아저씨’로 기대하고 보러 갔다가 다소 실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괴물 같은 영화’다. 액션과 스릴러 모두 만점이 몇 점인지 모르지만 만점을 다 줘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틀이 딱 들어맞는 드라마, 긴장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시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코미디까지 ‘재미있는 영화’의 요소를 다 갖췄다. 영화의 감동을 재미에서 찾는다면 이만큼 감동적인 영화가 있을까 싶다.

영화는 2007년이 배경이다. 17년 전 여성 10명의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자처하는 ‘이두석’(박시후)이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서전을 내놓으며 대중 앞에 섰다. 2년 전 공소시효 15년을 무사히 마친 그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피해자들의 유족은 그의 후안무치에 분노하고, 그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최형구 반장’(정재영)은 공소시효가 끝나 더 이상 단죄할 수 없다는 현실에 좌절한다. 반면, 잘생긴 외모에 깔끔한 매너를 갖춘 이두석에게 열광하는 팬덤까지 형성된다. 심지어 취재하던 일부 여기자들까지도 그에게 흠뻑 빠져들 정도다.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두석은 인세로 무려 270억원을 벌어들인다.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족은 더욱 치를 떤다. 결국, 그들은 자력구제를 위해 이두석을 납치하려 하고, 최형구는 그 시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액션신은 어느새 한국의 액션이 이렇게 발전했는가를 실감케 한다. 도입부의 좁은 골목길과 지붕들에서 복면의 범인과 최형두가 뛰고 점프하며 벌이는 격투, 이두석을 납치한 피해자 가족들과 이두석이 달리는 여러 대의 자동차를 넘나들면서 펼치는 격투 등 펀치, 킥, 칼, 총 등이 난무하는 숨막히는 리얼 액션부터 고속 주행 중인 오토바이와 대형 트럭 간 쫓고 쫓기는 강렬한 카 체이싱까지, 상영 중인 대니얼 크레이그(44)의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 ‘007 스카이폴’(감독 셈 멘더스)은 물론 액션 영화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톰 크루즈(50)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견줘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총 촬영 회차 73회 중 45%인 33회차, 전체 예산의 3분의 1이 투자됐다고 해도 할리우드의 몇 십분의 일, 몇 백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비용으로 이 수준을 만들어낸 것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스릴러도 발군이다. 관객들의 숨을 조여오는 긴장감, 예기치 않은 반전, 이두석의 정체가 밝혀질 때의 짜릿함은 글로 다 옮길 수 없다. 스포일러가 우려돼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아쉽다.

드라마도 대단하다. 연기파의 면모를 재확인시켜준 정재영, 스크린 데뷔작인 이 작품을 통해 안방극장의 스타에서 영화계의 신성으로 제대로 변신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박시후, 관록의 카리스마를 유감 없이 보여준 김영애(61)가 물고 물리면서 펼쳐보이는 드라마는 범죄의 가해자, 추적자, 피해자의 단순한 삼분을 넘어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여성 관객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을 만큼 액션은 있되 폭력은 없고, 스릴러는 있지만 잔인함은 덜하다. 박시후가 수영장 신에서 보여주는 탄탄한 몸매도 여성 관객을 위한 제작진과 출연진의 특별한 서비스다.

주목할 것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도맡은 정병길 감독이 불과 만 32세이고,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액션배우다’를 연출해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장편 상업영화 연출은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정 감독은 “언젠가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고 만약 진범이 공소시효가 끝난 후 사회에 나타난다면, 그리고 책을 써서 범행을 고백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면서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오락 스릴러를 만들고 싶었다. 연쇄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 관객의 가슴에 안착할 수 있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해학적인 웃음을 넣기도 했고 액션도 새로운 부분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봉준호(43)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2003년 관객 500만명을 기록하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에 일조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헌은 어쩌면 정 감독의 ‘나는 살인범이다’를 낳는 모티브가 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살인범이다’ 속 액션은 2012년 관객의 눈 높이에 맞게 진일보하고 드라마는 그들의 구미에 맞게 업그레이드 됐지만, 그 혈관에는 허름한 선술집, 배수관 속 시신, 경찰서 자장면 등으로 대표되는 ‘살인의 추억’의 DNA가 살아 숨쉬고 있다. 정 감독의 ‘나는 살인범이다’가 10년 뒤 어떤 신인 감독에게 영감을 줘서 얼마만한 대작, 걸작, 역작을 만들어내게 할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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