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이익보다 개인의 안락과 이익이 우선시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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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성률
  • 승인 2012.08.26 2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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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칼럼] <3> 영화 <도둑들>의 흥행이 담고 있는 시대적 의미

 

영화 <도둑들>의 포스터.

<도둑들>의 흥행 기세가 매섭다. 25일 하루 동안만 21만 5072명을 동원해 총 관객 1190만 9093명을 기록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1174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왕의 남자>와 <괴물>뿐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왕의 남자>의 1230만 명은 가뿐히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데, 최종적으로는 1301만 명의 <괴물>로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면, 개봉 영화 가운데 최고의 흥행 기록을 수립한 <아바타>의 1335만 명을 넘어설지도 관심사이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인 <도둑들>의 엄청난 흥행을 어떻게 봐야 할까? 흥미진진한 심리전의 내러티브, 다양한 다중 캐릭터의 매력, 후반부의 스펙터클한 볼거리, 홍콩, 마카오, 부산을 오가는 국제적 프로젝트……. 어떻게 보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10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이 가능할까? 5000만 가운데 1000만 관객을, 이 ‘불법 다운의 천국’인 곳에서 동원하려면, 주 관객층인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을 넘어 30대, 40대 관객, 심지어 50대 관객을 동원해야만 한다. <왕의 남자>가 엄청난 흥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극장을 거의 찾지 않는 50대, 60대 관객들이 꾸준히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역대 최고의 흥행을 한 영화는 <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해운대> 등이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한국적인 상황을 영화 속에 적당하게 장르적으로 조율해서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친미 국가인 남한의 상황을 재난영화로 녹여낸 <괴물>, 정치적 풍자와 하층민의 아픔을 적절히 조율한 <왕의 남자>, 한국전쟁의 아픔을 형제의 고통으로 그려낸 <태극기 휘날리며>, 분단 시대 독재 정권의 희생자를 그린 <실미도>, 가족과 코믹을 재난영화로 직조해낸 <해운대>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도둑들>에는 그런 것이 없다. 분단의 상황도, 멜로적 정서도, 코믹적 웃음도 모두 전면에 강조되지 않았다. 단지 10명의 도둑이 엄청나게 비싼 다이아몬드를 훔치다가 서로를 배신하는 내용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질문을 바꾸면 왜 관객들은 이런 영화에 엄청난 호응을 한 것일까?

원론적으로 가보자. 영화의 흥행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말을 바꾸면 어떤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할 때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시대적 의미가 반드시 녹아있다. 영화가 어떤 다른 매체보다 시대의 집단무의식적 안테나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해서 영화를 보면 그 시대적 정서를 알 수 있고, 이후 나아갈 방향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도둑들>을 보면 어떨까? 먼저 최동훈 영화의 특징을 논해야 할 것 같다. 이제까지 그는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등을 만들면서 흥행에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4타수 4안타, 홈런 2개, 3루타 1개, 2루타 1개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 엄청난 흥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의 영화에는 사기꾼, 도박꾼, 도술인, 도둑 같은, 우리 사회의 질서 밖에 있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어둠과 부패와 탐욕이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꽤나 불편한 영화이다.

최동훈 영화에는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작동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첫째, 최동훈의 영화 속 도둑은 좀 도둑이 아니라 언제나 그 분야의 최고 프로들이라는 것. 둘째, 그런 프로가 자신의 부모나 형제, 스승의 복수를 같은 방법으로 최고의 기술로 행한다는 것. 셋째, 이 과정에서 경찰과 악당에게 동시에 쫓기면서 경찰을 무력화시킨다는 것. 넷째, 그들은 일을 끝낸 뒤에도 여전히 그런 일을 하며 쫓겨 다닌다는 것. 이 공식에서 벗어나는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여기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최동훈의 영화, 특히 <도둑들>은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인간들, 즉 체제에 저항하는 인간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야의 최고의 프로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이 함께 모여 일을 도모하지만 결국 그들은 함께 가지 못한다. 여기서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최동훈은 인간의 탐욕과 공동체의 가능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관점은 지금 우리 사회와도 그리 먼 관계에 있지 않다. 더 나가면, 최동훈은 한번 도둑이 된 이들이 영원히 도둑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론적 세계관을 통해 더욱 부정적으로 현실을 스크린 속에 재생시킨다. 이것 역시 지금 우리 사회와 그리 멀지 않은 관계에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경찰이 폭력을 막지 못해 개인이 영웅이 되어야 하는 내용을 다룬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스타일로 보거나 내용으로 보거나 <도둑들>보다 더 흥행할 수 있는 영화였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도둑들>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비해 더블 스코어를 기록했다.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 대 그 질서를 파괴하려는 사람의 대결에서 후자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단지 이것을 두고 일시적인 쾌락원칙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도둑들>에서 이 시대의 허무를 본다. 이제 우리에게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거대 담론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아니면 접어들고 있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안락과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 되는 사회가 되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사회, 적자생존, 치열한 경쟁의 사회가 되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아니면 서서히 그런 사회로 나가고 있다.

더 나가면,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보다 반대편에서 교란하면서 오히려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활개 치는 시대. 무엇을 하든, 설사 그것이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라 하더라도 최고가 되어 먹고 살면 된다는 의식이 지금, 부끄러운 우리의 ‘시대정신’ 아닌가? 청문회에서도 사소한 범죄는 범죄로 여기지 않는 사회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심지어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무관한 사회가 아닌가?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 안의 이명박’을 <도둑들>만큼 정확히 보여주는 영화가 어디 있는가? 영화 <도둑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런 집단무의식을 전시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프로필>
 영화평론가
 광운대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주간 <무비위크> 스태프 평론가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 집행위원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친일영화>
 <영화는역사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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