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향기 속에서 제주불교의 역사를 만나다
연꽃 향기 속에서 제주불교의 역사를 만나다
  • 고희범
  • 승인 2012.08.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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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25회 제주탐방 후기

당 5백, 절 5백이라던 제주섬.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맞물리면서 제주에서는 당과 절이 수난을 당해왔다.

그 수난이 절정에 이른 것은 1702년 이형상이 제주에 목사로 와 있던 1년 3개월의 짧은 기간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정치권력이라 하더라도 백성의 마음까지 지배하지는 못하는 법 아니던가. 민간의 신앙은 핍박의 강도 만큼이나 질기게 지하로 스며들어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최근 제주전통문화연구소는 2년에 걸친 조사 결과 지금까지 각 마을에 남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당 391곳을 확인했다. 또한 불교는 수많은 역사적 질곡을 거치면서 산에서 내려와 민가에 불상을 모신 '인법당'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자비의 진리로 중생을 제도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고무하면서, 모든 욕심과 번뇌에서 벗어나 참 해방을 누릴 것을 가르쳐온 불교가 제주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어떻게 자리잡아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 성쇠의 흐름은 어떠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그 큰 그림 가운데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제주불교사에서 대표적인 사찰 3곳을 찾아 나섰다.   
 
한라산 해발 1200m 고지 상원(上院)의 존자암, 중원(中院)에 해당하는 법정악의 법정사, 그리고 하원(下院)의 법화사다. 원(院)은 관리들이 행차를 할 때 말을 갈아타거나 휴식을 취하는 중간 지점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사찰이 원(院)의 역할을 한 데서 상원, 중원, 하원의 구분이 비롯된 것이다. 
 
도내 최대 사찰 법화사
 
가장 아래쪽에 있는 하원은 대포리 해안에서 4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서귀포시 하원동에 해당한다. 이 마을에 있는 법화사는 원나라가 탐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고려 원종 10년(1269년)에 중창을 시작해 10년 뒤 완공된 사찰이다. 당시 외도의 수정사, 삼양의 원당사와 함께 도내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법화사 터에서 발굴된 주춧돌과 각종 석재. 제주의 현무암이 아닌 육지 돌들이다.
제주에서 보기 어려운 기와 파편들. 법화사의 중창 시기가 기와에 새겨져 있다.

지난 1982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법화사는 건물이 모두 10동이었고, 가장 큰 법당은 105평에 이르는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여러 모양의 기와와 도자기, 청동 숟가락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됐다. 여기서는 봉황과 용 무늬가 새겨진 막새(추녀끝을 장식하는 기와)도 발굴됐다. 봉황이나 용 무늬 막새는 왕실 건축에나 사용되던 것들이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백년도 훨씬 지난 조선 태종 6년(1406년), 명나라는 법화사의 불상을 원나라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동불상 3좌를 돌려준다. 세 불상을 담아 옮긴 궤는 판자 1천장, 쇠 6백근, 마 7백근을 사용해 만들었고 짐꾼은 수천명이었다고 한다. 서귀포시 강정포구 서쪽의 '세불포구'라는 지명은 '세 불'. 즉 법화사의 삼존불이 떠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삼존불을 빼앗기고 난 2년 뒤인 태종 8년에는 억불정책에 따라 법화사의 382명이던 노비가 30명으로 줄어들고,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국의 사찰에 속해 있던 논밭과 노비 수를 대폭 줄이는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1653년 이원조가 남긴 <탐라지>에는 법화사가 "단지 초가 암자 몇 칸만 남아"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제주도의 사찰들이 '인법당'의 형태로 명맥만을 유지하게 된다. 사찰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불상을 민가로 옮겨 법당을 차린 것이다. 말이 법당일 뿐 살림집에 불상을 모신 것이었으니 조선시대 불교는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법화사 경내에 남아있는 '인법당'. 10평 정도의 초가였던 건물 지붕을 기와로 바꿨다. 건물 오른쪽 유리창 밖으로 '대웅보전'이라고 쓰인 현판이 보인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4.3 당시 토벌대는 1948년 10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벌였다. 토벌대는 중산간의 건물을 무장대가 이용할 수 없도록 부수거나 태워버린 것이다. 사찰들은 대부분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불상은 스님들이 옮기기도 했지만 탱화와 집기 등은 이 시기에 대부분 사라졌다. 제주에 불교 문화재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다.
 
이후 1950년 3월 신도들이 법당과 요사채를 지어 법화사를 재건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은 법화사를 육군 신병훈련 숙영지로 접수했다. 대웅전을 본부로 사용하는가 하면, 법화사 주변에서는 사격 훈련까지 이루어져 옛 유적과 유구들마저 파손되고 말았다.
 
법화사는 지난 1987년 애초 대웅전의 규모와 같은 크기로 복원했다. 대웅전에는 명나라에 빼앗긴 삼존상을 상징하는 금동삼존여래상을 봉안해놓았다. 대웅전 남쪽에 조성된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하다. 8월 19일부터는 강명순 화백의 연꽃그림 전시회와 함께 연꽃축제가 열린다.

 

대웅전 앞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무장항일투쟁에 나선 법정사
 
중원으로 불리는 서귀포시 도순동의 법정악에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법정사가 창건됐다. 법정사 창건에 관련된 승려들은 1909년 제주의병항쟁의 의병장으로 나섰던 김석윤을 비롯해 항일의식에 투철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등이다. 사찰이 들어선 뒤 김연일 등 승려들은 신도들에게 꾸준히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마침내 이들은 삼일운동보다 1년 정도 앞선 1918년 4월부터 조직을 구성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김연일이 총지휘를 하고 좌대장, 우대장, 선봉대장, 후군대장을 두어 수많은 참여자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6개월 뒤인 10월 7일, 도순리 인근의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등의 신도와 주민 7백여명을 이끌고 무장항일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들은 "일본인 관리를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거사의 목적을 밝힌다. 거사 당일 새벽 34명의 선봉대가 깃발과 화승총, 몽둥이를 들고 법정사를 출발해 서호리-호근리-강정리-하원리를 거쳐 중문리로 나아가는 동안 미리 소집해놓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7백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기물을 부수고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의 기마순사대가 공격해오자 참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66명이 붙잡혀 구금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거사를 주도한 김연일 강창규 등을 붙잡지 못한 일제는 체포된 참여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했다. 조사과정에서 2명이 숨지고, 3명은 수감 중에 옥사할 정도였다.

 

승려와 신도들의 무장항일투쟁에 대한 보복으로 불태워진 법정사 터.

법정사 무장항일투쟁은 조직을 구성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등 6개월여의 사전 준비 기간에도 발각되지 않았고, 거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짧게는 1년 6개월에서 길게는 4년 4개월이나 숨어지낼 수 있었을 만큼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컸다.
 
반면 일제는 이 사건을 축소 왜곡하는 데 급급했다. 이날 해설을 맡은 한금순 박사는 "일제가 자신들이 남긴 재판기록 내용과는 달리 참여자 수를 3백여명으로 축소한 데 이어 '미신이 성행하던 제주에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난리'로 왜곡하면서 '보천교의 난'으로 명명했다"면서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지역에서는 주도자들이 승려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 주민들도 있었다. 흰색 한복을 입고 머리를 기른 데다 당시 신흥종교였던 보천교의 교리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박사는 이들 승려들이 모두 승적을 갖고 있었고 복역하고 풀려난 뒤에도 사찰을 창건하는 등 불교활동과 항일운동을 계속한 점을 들어 '법정사 무장항일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법정사 터의 우물. 거사 당일 새벽 34명의 선봉대는 이 물을 나눠 마시며 결의를 다졌을 법하다.

당시 검거돼 가혹한 고문을 받은 참여자들 대부분은 고문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어 이 가운데 상당수의 인사들이 자녀를 갖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도 지정문화재 기념물(제 61-1호)로 지정돼 있고 '의열사'에는 검거 투옥됐던 66명의 영정을 모셔 놓고 있다. 김연일 등 28명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됐고 매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법정사 터 앞에 있는 구조물.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제주불교의 발원지 존자암
 
제주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탐라국이 백제 신라 일본과도 교류했던 점으로 미루어 이들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탐라국 개국과 같은 시기라는 주장도 있다. 존자암(尊者庵)에 대한 기록과 불법의 전파과정을 다룬 불경의 기록이 근거로 제시된다.
 
조선시대 홍유손은 "존자암은 삼성(고 양 부 三姓)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되어 세 읍(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三邑)이 정립한 뒤까지 오랫동안 전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존자암이 탐라국 개국과 함께 세워져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는 뜻이다. 거기다 고려대장경 법주기(法住記)의 기록은 예사롭지 않다. 법주기는 AD 3세기경 쓰여진 불경으로, 석가모니의 불법 전파과정을 해설한 경전이다.
 
법주기에는 '탐몰라주 존자도량'(耽沒羅洲 尊者道場)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석가세존이 열반에 든 뒤 제자인 16존자가 세계 각처로 흩어져 불법을 전파했는데, 그중 제6존자인 발타라존자가 9백명의 제자를 데리고 '탐몰라주'(耽沒羅洲)로 갔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이능화 선생은 1917년 <조선불교통사>에서  '탐몰라주'가 탐라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서에는 '탐라'라는 이름 외에 '탐모라'(耽牟羅), '탁라'(乇羅)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하원의 법화사와 중원의 법정사 터를 거쳐 문제의 존자암으로 향했다. 상원, 그러니까 영실지구 볼레오름 서쪽 해발 1200m의 고지에 있는 존자암은 번듯하게 지어져 있었다. 맨 위에 국성재(國聖齋)가 있고 대웅전과 누각이 줄지어 서 있고 서쪽에는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1998년 중창이 시작된 것이다.

 

제주불교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존자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터에 다시 사찰을 지었다.

존자암은 고려시대에 비보사찰로 국가의 지원을 받았고 조선시대 들어 논을 하사받아 나라의 평안을 비는 국성재(國聖齋)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694년의 기록은 "부서진 지붕과 몇 개 기둥이 남아있는 모습이었고 산에 놀러왔을 때 점심을 해 먹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고, 1702년 목사 이형상은 "존자암은 초가 몇 칸으로 남아 있으나 스님은 살지 않는다고 하고, 산에 오를 때 숙식할 뿐"이라고 기록해 당시 사찰의 기능은 이미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3년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부도탑과 목탑의 초석, 국성재 제단 터의 주춧돌, 비각의 지붕 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또 주변에서 상감청자 조각과 분청사기 조각, 백자 조각 등 불사에 이용했던 유물과 각종 기와 조각도 발굴됐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다는 부도탑. 제주의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존자암에 도착하자 상각스님이 우리를 맞았다. 그는 존자암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존자암이 있는 볼레오름의 한자이름이 불래악(佛來岳)인 것도 발타라존자가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갖고 온 근거"라고 덧붙였다. 스님은 존자암에 대한 긴 설명 끝에 "제주가 자연환경 외에 제주어, 문화, 역사 등 인문이 더해져야 세계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존자암의 유래를 설명하는 상각스님. 그는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이어갔다.

제주불교는 탐라국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될 만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중요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는 마을마다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탄압 시기를 거쳐 제주인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역사적 수난기에 제주의 불교도 고난을 당했다. 이날 우리는 제주불교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세 곳의 사찰을 통해 제주인의 삶과 제주불교의 성쇠를 살펴볼 수 있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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