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건축, 그리고 삶의 흔적
길과 건축, 그리고 삶의 흔적
  • 고희범
  • 승인 2012.05.2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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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22회 제주탐방 후기

신록이 상큼하면서도 화려하게 제주도 전역을 뒤덮은 5월의 둘째 주말. 우리는 산지천을 따라 제주시 원도심을 둘러보기로 했다. 산지천은 한라산 북쪽 사면 해발 720m 지점에서 발원해 제주시 아라동과 이도동, 일도동을 차례로 흘러 건입동의 제주항을 통해 바다로 나간다. 도심 한복판을 흘러가는 건천, 제주말로 '내창'이다.

우리는 제주시 일도2동 중소기업지원센터와 제주도서관 사이 ‘만남의 다리’에서 산지천 따라 걷기를 시작했다. 만남의 다리는 ‘다리’라기 보다 ‘작은 광장’처럼 느껴졌다. 너비가 15m쯤 되는 탓이다. 학생문화원과 연결되는 이 다리는 애초 북쪽으로 120여m 떨어진 산지1교까지 복개돼 광장으로 활용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청소년 쉼터와 만남의 다리. 산지천을 복개하려던 계획이 수정되면서 넓은 다리가 만들어졌다.

이 계획이 수정돼 다리와 ‘청소년 쉼터’가 만들어지고 산지천을 따라 ‘청소년의 길’로 이름 붙여진 산책로를 냈다. 천만다행이다. 만일 애초 계획대로 공사가 진행됐다면 언젠가 다시 걷어내야 할 것이었다. 청소년의 길 주변 지역은 수운근린공원을 포함해 여유있는 녹지공간과 단독주택들이 밀집돼 있어 아늑한 주거환경을 갖추고 있다.

 

산지1교에서 바라본 만남의 다리. 이 내창 120여m가 복개돼 광장이 될 뻔했다.

이 일대의 산지천 바닥을 채우고 있던 커다란 바위들은 하천정비사업에 따라 모두 사라지고 물길의 고속도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바위들은 큰 비가 내릴 때 물의 빠른 흐름을 막는 효과와 함께 하천 양쪽의 우거진 숲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냈었다. 한라산에서 북쪽으로 제주시를 향해 흘러내리는 산지천 병문천 한천 독사천은 이렇게 정비됐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 즉 건천이다가 비가 내리면 한라산에서 제주시 앞 바다까지 이들 하천을 따라 물이 흐른다. 큰 비가 내리면 한라산에서 바다까지 짧은 거리를 급하게 흘러내린 물은 복개돼 버린 하천 하류에 이르러 주변지역을 침수시킨다. 지난 2007년 엄청난 폭우를 몰고 온 태풍 나리로 제주시내 4개 하천이 모두 범람해 큰 피해를 입혔는데 하천 복개 탓이 컸다.

 

물의 빠른 흐름을 막아주던 바위가 하천정비사업으로 제거된 뒤 물은 고속도로를 달려내려간다.

산지1교를 건너가자 산지천변에 누군가 고추모종과 양파 등 채소로 아담한 텃밭을 꾸며놓았다. 산책길에 놓인 벤치는 주변과 잘 어울렸으며 제주시 노인회관과 이웃한 공간은 노인들의 쉼터로 적절했다. 산지천에는 일상의 삶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산지천변의 텃밭(위), 노인들의 쉼터(가운데), 산책로의 소박한 나무 벤치(아래).

산지천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동여자중학교 앞에서 길을 건너 '제주 기적의 도서관‘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66세를 일기로 타계한 건축가 정기용의 작품이다. ’건축업자의 하수인‘임을 거부하고 가진 것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가장 편리한 건축물을 만들어낸 건축계의 비주류로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기적의 도서관은 지난 2003년 MBC의 프로그램 ‘느낌표’를 통해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 지방 도시에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건립해 나가는 기획에 따라 전국 10곳에 지어졌다. 이 가운데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등 6곳이 정기용의 무료 설계로 지어졌다. 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어린이 전용 도서관은 그 개념조차 낯선 상황에서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2004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관했다. 대지 7백평에 건평 2백평쯤 되는 건물이다.

 

삼각형의 도서관 건물은 어린이들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잔디밭은 주민들이 드나들기 쉽도록 도로의 높이와 같게 설계된 것이 눈에 띈다.

건축가 정기용은 기적의 도서관 설계와 관련해 "건축의 기본원리는 주변 동네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동네의 단독주택들이 집합된 풍경과 공존하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낮게, 그러나 분절된 여러 개의 공간으로 분화시키면서" 이용자들의 편의를 가장 중심에 두고 설계했다고 밝혔다. 제주 기적의 도서관은 사방으로 길과 연결돼 어디서든지 출입할 수 있고, 잔디밭은 도로와 같은 높이에 배치해 동네주민들이 어떤 경계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됐다.

동부경찰서 서쪽으로 흐르는 산지천은 문예회관 앞 일주도로를 건너야 다시 만날 수 있다. 신산공원을 오른쪽에 끼고 이어지는 산책로는 제주의 도심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신산공원과 산지천 사잇길. 5월의 나무와 풀잎의 싱그러움이 도심을 여유롭게 만들고 있다.

우리의 탐방은 산지천을 잠시 빠져 나와 탐라국 건국의 중심인 삼성혈로 향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솟아났다는 곳. 가죽 옷을 입고 사냥한 고기를 먹으며 살다가 오곡 종자와 송아지 망아지를 갖고 온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해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는 탐라국 건국 신화의 시발지점이다.

삼성혈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울창한 나무들은 도심 속의 녹지로 뛰어난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내 곳곳의 숲이 전쟁용 물자로 사라져간 것처럼 삼성혈의 거목들도 진지 구축용으로 잘려나갈 위기를 맞았다. 일제의 위협을 받았던 당시 삼성사재단의 고인도 이사장이 목숨을 걸고 버틴 덕에 살아남은 것이다.

 

 

울창한 숲이 잘 보존된 삼성혈. 삼성사재단 이사장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이다. - 다음 지도

일본군 사령관에게 불려간 고 이사장은 "나무를 내놓고 자손들에게 맞아 죽으나, 나무를 내놓지 않고 당신에게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니 승락할 수 없다"고 했다. 사령관은 욕지거리와 함께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령관 사무실 앞에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줄 지어 서있는 군인들이 자신의 목을 벨 것으로 여겼던 고 이사장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내복이 완전히 젖어 있을 정도"로 위협을 느꼈다는 후일담이 아들 고달익 선생으로부터 전해진다.

삼성혈을 한바퀴 돌아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우람한 칼 호텔이 버티고 서있다. 19층의 이 호텔은 높이 72m로 1974년 신축 당시 제주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기록은 제주의 원도심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높은 지형에 우뚝 솟은 호텔 건물은 제주 시가지의 스카이라인을 해쳐 잘못된 건설행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삼성혈 너머 보이는 칼 호텔. 관제탑 모양의 호텔은 신축 당시 제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호텔 건축 허가 당시에는 고도제한이 없었다. 호텔이 들어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제주시 55m, 서귀포시 40m라는 고도제한은 1997년 수립된 경관고도규제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 점에서 칼 호텔은 제주 개발역사의 의미있는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삼성혈 뒷쪽 주택가에는 폭이 1.5m 남짓한 옛 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자동차가 대문앞까지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눈이라도 쌓이면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 손을 짚으며 걸어들어가야 하는 골목이다.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정도의 좁은 골목길과 돌담은 사람사는 냄새를 풍긴다.

이날 우리를 안내한 제주대 김태일 교수(건축학)는 이 골목길 앞에서 "좋은 건축이란 불편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건축"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바로 자기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해 보이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동네사람을 만나거나, 계절의 변화를 느끼거나, 이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눈이 내리면 눈을 맞으며 하늘도 바라보고 세상사의 변화도 느끼는 것이 불편하지만 삶의 즐거움이 아니겠느냐는 말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삼성혈을 벗어나면 서민들의 삶의 현장인 보성시장으로 접어들게 된다. 시장은 반찬이나 채소, 생선을 파는 가게가 좁은 길을 따라 옹기종기 배치돼 있다. 집에서 잠깐 걸어나와 저녁 반찬거리를 살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작은 시장이다. 보성시장 순대국밥은 아직도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의 보성시장.

보성시장을 벗어나 중앙로로 나오자 칼호텔 맞은 편의 교보생명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김태일 교수가 주일본 미국대사관 건물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교보생명 본사 건물과 제주의 교보생명 건물이 똑같이 생겼다. 전국 각 지역에 똑같은 모양의 빌딩을 갖는다는 것은 기업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지역의 환경과 정서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다.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라지.

 

 

주일 미대사관을 그대로 베낀 교보생명 사옥. 전국의 사옥이 똑같은 설계로 지어졌다.

산지천은 삼성혈 앞에 있는 삼성교 아래를 지나 기산아파트 서쪽으로 흐른다. 산지천이 깊어지면서 유독 높게 설치된 삼성교는 1960년대 청소년들 사이에 '콰이강의 다리'라고 불렸다. 당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제목을 갖다 붙인 것으로,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도록 높게 만들어진 다리가 닮았다는 것이었다. 멋있는 이름과 함께 이곳이 당시 제주도심의 거의 유일한 데이트 코스로 떠올랐다.

삼성교 주변에 이르러 산지천은 갑자기 깊은 계곡을 이루며 바닥의 바위들과 양 옆의 울창한 숲이 도로 살아나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고 위험을 막는 철책 끝 부분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벗어나 계곡 아래를 돌아볼 수 있다. 한때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과 함께 텃밭을 일구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계곡은 산지천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삼성교 주변 산지천은 하천정비사업에서 제외된 듯 내창의 바위들이 그대로 남이있다. 산지천 양 옆의 울창한 나무들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자연의 숨소리가 들린다.

계곡을 벗어나자 소박한 주택들이 늘어선 동네가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자 남수각이 있던 자리다. 이곳엔 표지석만 전봇대 안쪽에 방치돼 있었다. 남수각은 산지천에 만든 다리 위의 누각으로 홍수 때마다 유실된 것을 다시 짓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남수각이 있던 자리임을 말해주는 표지석마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산지천 서쪽으로 제주읍성의 성곽이 170여m 남아있는 오현단이 있다. 성곽은 지나칠 만큼 깔끔하게 복원돼 있다. 도내의 성곽이 복원된 곳마다 애초의 형태를 잃어버린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가지런한 모습은 원형과 크게 다를 뿐 아니라 성곽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구성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복원된 제주읍성의 성곽. 남문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170여m가 남아있다.

오현단은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한 뒤 제주의 교육과 학문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는 제단으로,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이다.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이 헐리게 되자 그 터에 이 제단을 설치했다.

 

성곽 안쪽의 오현단.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5㎝, 너비 20㎝의 비가 서 있다.

오현단 북쪽으로 오현중고등학교가 있었다. 지난 1975년 화북으로 이전하고 난 뒤 학교의 운동장과 교실이 있던 자리엔 연립주택과 상가가 빼곡이 들어서있다. 이 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성담은 안쪽으로 무너져 내려 성곽 위로 오르기가 쉬웠다. 점심시간에 조천 삼양 화북 외도 하귀 등 시 외곽지역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성담 위에서 도시락을 까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성곽 아래엔 올망졸망한 작은 밭과 시커먼 토종돼지를 기르던 우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포장도로가 지난다.

오현단 서쪽 암벽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증자와 주자가 쌍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운다'는 뜻의 이 글은 원래 서울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다. 제주 출신의 성균관 직강이 이 글씨를 모사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제주목사가 새겨넣은 것이다.

 

서울 성균관 벼랑에 새겨져 있던 송시열의 글씨를 송시열을 기리는 뜻에서 옮겨 새겼다.

우리의 탐방은 산지천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제주읍성의 남문이 있던 남문로터리에서 바다쪽으로 뻗은 일방통행로는 조선시대 제주읍성으로 들어와 한짓골을 따라 관덕정으로 이어지는 대로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MBC의 전신인 남양방송과, 시화전이 끊임없이 열리고 60~70년대 낭만의 현장이던 소라다방 건물이 남아있다.
 

한짓골 서쪽 골목에 있는 제주의 전통적인 초가. 집주인이 고집스럽게 매년 지붕을 잇고 있다.
숙종 17년(1691년) 지은 향사당. 좌수, 좌별감, 우별감이 상근하던 청사다. 1981년 개보수됐다.

한짓골 서쪽으로 나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자 300여년의 역사가 고스란이 간직돼 있었다. 의연하게 버티고 서있는 도심 속 초가를 지나면 조선시대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던 ‘향사당’이 있고, 해방공간에서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조선민주청년동맹’이, 4·3 당시 악명높던 ‘서북청년회 제주지부’가 결성됐던 조일구락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도내 최초의 극장이던 제주극장으로 사용됐지만 지금은 낡은 모습 그대로 몇개의 점포가 들어가 있다.

 

제주현대사 격동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 제주도가 매입해 보존할 만한 역사적 건물이다.

'현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던 이 건물 북쪽에는 1908년 제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현장 성내교회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관덕정 앞 큰길로 나서면 1958년 관덕정 광장 서쪽에 건축된 제주시청사에 이른다.

 

이기풍 목사에 의해 제주에 처음 세워진 교회 터. 세련된 현대풍의 교회건축물이 들어섰다.
1980년 제주시청이 현재의 위치인 제주도청사로 이전되면서 개인에게 매각됐다.

제주시의 원도심은 서울의 북촌을 연상시킨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의 주거지역이던 북촌의 좁은 골목길과 낡은 한옥들은 산업화시대에 마치 두루마기에 갓을 쓴 유학자를 고층빌딩 숲에서 만나는 것만큼이나 생뚱맞았다. 하지만 북촌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 당시 삶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그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면서 최근 들어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의 북촌 처럼 제주의 역사와 문화와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제주의 원도심은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보석처럼 빛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3시간에 걸친 탐방은 여기서 끝났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삼도2동 주민센터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한 공공건축의 대가이자 건축계의 이단아 정기용의 생의 마지막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감상했다. 전북 무주와 경기 안성에 주민센터 설계를 부탁받고 그는 주민들을 만났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듣고자 했다. 그는 주민들의 요구대로 주민센터에 목욕탕을 담았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시설이 들어가도록 설계된 안성면주민센터는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다.

미학을 전공한 뒤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평생 수많은 공공건물을 설계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는 "건축가로서 내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신념은 "건축이 더 이상 부동산으로 가치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의미있는 질적 변화를 줄 수 있는 문화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축에 대해 그의 남다른 철학을 보여준 영화 <말하는 건축가>는 깊은 감동을 안겨줬다.

건축가이면서도 자신은 정작 집 한채도 소유하지 않았던 정기용. 지난해 타계한 그가 남긴 유언은 이랬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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