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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SBS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의 오류지적
윤봉길의사, SBS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의 오류지적
  • 미디어제주
  • 승인 2011.08.1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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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윤봉길의사, SBS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의 오류지적

광복66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독립지도자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가슴속 깊이 새기게 한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안중근 의사, 이준, 유관순 열사 등 그리고 만24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의 백만대병(百萬大兵)도 하지 못했던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이룬 상해의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문제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광복절을 맞이하여 전국 주요8개 도시에서 열렸던 ‘플래시몹’은 지금까지 우리가 우려했던 대한의 청소년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다시 한번 느끼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광복절을 맞이하여 전날인 14일 방영된 SBS광복절 특집이라는 “일본이 찍은 체포사진 속 인물, 그는 윤봉길 인가”라는 다큐멘터리는 지난 3.1절 특집으로 이미 방영했던 다큐멘터리로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인터뷰와 편집을 한 것이 아닌가”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재방송 다큐멘터리를 재방영이란 표시 없이 광복절 특집으로 또다시 방영하면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실증하는 연행사진을 왜곡하여 많은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다. 이에 SBS다큐멘터리의 오류를 지적하여 바로 잡고자 한다.

첫번째로 ‘윤봉길의사 순국(처형) 때 40발의 총성이 울렸다’는 내레이션은 SBS다큐멘터리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윤 의사 사형 집행은 극비로 진행되었고, 정 사수가 10m앞에서 쏜 1발이 윤 의사의 미간에 명중했다. 더 이상의 총성은 없었다. <사진>

 

두번째로 ‘대판 조일신문 호외 1932년 5월 1일자에 게재된 연행사진을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조작의혹이 든다’는 것은 좀 더 정확한 부분을 확인했어야 했다. 대판 조일신문 호외(1932년 5월 1일) 상단에 본사 특파원이 촬영했다는 기사가 있으며, 더구나 동경 조일신문 호외(1932년 5월 1일)에는 사진촬영은 본사 상해특파원이 했다고 명백히 밝히고, 사진운송경로도 자세히 보도했다. 동경 조일신문 상해특파원이 촬영한 것을 동경 조일신문과 대판 조일신문이 함께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동경 일일신문 호외(1932년 5월 1일)도 자사 특파원이 촬영한 연행사진 등 상해폭탄사건사진을 보도하면서 촬영자 사토(佐藤) 기자의 이름과 사진운송경로(운송 편, 운송시간 및 경유 장소)를 보도했다.

세번째, ‘선서식 사진과 연행사진의 모습이 다르며 연행사진 속의 사람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진은 날씨, 상황, 분위기 등 촬영 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은 옆모습만 보아도 알아 볼 수 있다. 윤 의사 부인과 동생이 윤의사가 맞다고 이미 확인했다. 또한 윤의사의 고향친구, 윤 의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야학생 중 그 누구도 “연행 사진 속의 사람이 윤의사가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 거사 동반자 김구 선생도 윤의사임을 확인했다.

네번째, ‘의거 당시 윤 의사는 양복을 입었다. 그러므로 연행사진 속의 코트를 입은 사람은 윤의사가 아니다’라는 부분은 그러면 만일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었다면 신문은 한복을 입었다고 보도했을 것이다. 통칭하여 양복과 스프링코트를 양복(서양 복장)이라 한다. 따라서 당시 신문들은 “양복을 입었다”, 또는 “양복에 스프링 코트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본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부분이 누락 되었다. 후일 일제가 윤 의사를 처형하기 위해 상해에서 오사카로 압송 시 오사카에 도착할 때 윤 의사는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 보도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조일신문 1932년 11월 22일자 보도). 그리고 상해의거를 최종 정리한 일본 공식문서 ‘상해에서의 윤봉길폭탄사건 전말’에 거사 때 윤 의사 복장은 양복과 코트를 입었다고 명백히 기록했다.

다섯번째, ‘체포 당시 그 상황에 중절모자를 손에 든 것도 의혹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신 일본의 보도기사에 의하면, 윤 의사는 연행될 때 손에 든 중절모자를 오사카로 압송될 때도 깊이 눌러 쓰고 얼굴을 가렸으며, 순국당일 형장에 도착할 때도 이 모자를 썼다(일본문서-사형집행시말서에 기록됨). 또한 이 모자는 유해발굴 때 함께 발굴되어 이강훈 선생이 고국으로 봉환했다(동아일보 1946년 4월 27일자 보도)

여섯번째, ‘체포 때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피가 낭자 했는데 연행사진에는 핏자국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1932년 5월 1일자 조일신문은 호외 앞면에 왼쪽 얼굴을 찍은 연행사진과 뒷면에 정면 얼굴을 찍은 연행사진 2매를 보도했다. 뒷면에 보도된 사진을 보면 윤 의사 얼굴에서 피 흘리는 장면이 선명하다. 체포될 때 윤 의사는 오른쪽 얼굴을 맞아 오른쪽 얼굴에서 피가 낭자한 것이다. 거사 때 윤 의사 바로 옆에 있던 일본군 병조 후본무언(後本 武彦)이 윤 의사를 잡아 엎어누른 순간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이 윤 의사를 폭행하자 재빨리 군중을 흩어버리고 헌병에게 인도했다.

일곱번째, 김구 선생이 친필로 저술한 도왜실기에 수록된 연행사진을 김구 선생이 수록했는지 의혹이 든다.

참, 한심한 의혹제기로 볼 수밖에 없다. 1932년 12월 1일에 발행된 도왜실기에 분명히 연행사진이 수록되어 있다(당시 발행된 도왜실기 원본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의거 전 윤봉길의사와 숙식을 함께한 윤 의사 동지 김광이 1934년 저술한 「윤봉길전」에도 도왜실기에 있는 연행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여덟번째, 중국인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폭탄은 19로군의 협조로 왕야치아오(王亞樵)가 만들어 도산 안창호 선생을 통해 김구, 윤 의사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소설로, SBS 다큐멘터리의 허구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폭탄은 상해 병공창 왕백수가 만들었고 김홍일을 통해 김구 선생에게 전달되었다. 중국인 왕야치아오는 윤봉길 의사 의거에 참여한 일이 전혀 없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윤 의사 의거를 모르고 당일 이유필 정무위원장(교민단장) 집을 방문했다가 당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아홉번째, 윤봉길 의사 순국 장소 좌표는 북위 36도 31분 30.54초이고요, 동경 136도 40분 19.57초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는 순국 장소 좌표를 ‘몇 초’까지 정확히 정할 수 없다. ‘몇 초’까지 정확히 정하려면 위도, 경도가 표시된 자료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 「사형집행시말서」「만밀대일기」에는 위도, 경도의 표시 없이 등고선 약도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몇 초’까지 정하여 윤 의사가 순국한 바로 그 지점을 찾을 수 없다. 금번 다큐멘터리에서 순국 지점을 찾은 것처럼 보도한 것은 과장 보도이며, 다만 순국지점에 근접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열번째, 한국인과 중국인을 두려워한 일제가 다른 사람의 연행사진을 윤 의사 연행사진으로 조작하여 대판 조일신문 1932년 5월 1일자에 보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판 5월 6일자 호외에서 조일신문(아사히신문)은 일본군사령부의 중간 발표를 보도했다. 이어서 다음 날인 5월 7일자 1면에 “범인 윤봉길” 이라는 설명문을 붙이고, 5월 1일자의 연행사진 중에서 윤봉길의 얼굴 부분만을 절취하여 크게 보도했다. 이때는 이미 군사령부의 중간발표가 나온 후이고 군사재판을 받고 있을 때 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작된 사진을 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의혹제기로 인해 윤 의사의 숭고한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자꾸만 언론을 이용한 의혹제기에 스스럼없이 공중파는 막강한 언론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풍기는 연행사진을 본적이 없다”(있을 수 없다)라든지, “당시 신문은 연행될 때 윤의사의 얼굴에는 냉소가 흘러나왔다” 고 보도했다. 그리고 “윤 의사 선서식 사진과 연행사진의 윤 의사 머리 모습이 다르다” 또는 “연행사진 속의 사람은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인다”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로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고 있다.

채정석 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1999년 의혹제기 이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회장 김학준)는 국가보훈처, 윤 의사 유족 등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한 확인을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KBS, 독립기념관, 국회(대정부질문, 김성태 국회의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 공신력 있는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검증을 거쳐왔다. 자꾸만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개인들에게 검증을 해서 의혹을 자꾸 만들어가기보다는 윤 의사가 1932년 월진회를 조직하여 ‘상애상조(相愛相助)를 말씀했듯이 소모적인 쟁점에서 벗어나 한마음 한 뜻으로 의사님의 민족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시기라 생각한다.

<채정석·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탄신100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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