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제주의 아픔이 녹아있는 역사 속으로
제주의 아픔이 녹아있는 역사 속으로
  • 고희범
  • 승인 2011.04.18 17:48
  •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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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10회 제주탐방 후기

4.3 제63주기를 맞은 4월. 제주에는 흐드러진 유채꽃 사이로 다시 추모의 물결이 인다. 피해자들이 오히려 '화해와 상생'을 이야기하는 기이한 현상은 제주도민들의 넉넉함 때문인가. 그러나 현실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할 것을 권고한 <진상조사보고서>의 결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아직 이를 추진할 뜻이 없다. 1만3천여명이 이미 희생자로 인정받고 대통령이 사과를 한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하는 데 아무 손색이 없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건국에 희생제물로 내던져진 제주, 이에 앞선 역사에서도 이 땅에는 불법적이고 무도하며 포악한 권력에 맞서 '창의'(倡義) 깃발을 날리던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민란'이다. '강제검의 난', '방성칠 난', '이재수의 난'.

조선 말기 제주에서 일어난 민란들이 조세 수탈에 저항한 것들이었고, 유독 대정 지역에 집중됐다는 것은 이 지역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말해준다. 이곳 사람들을 일컫는 별칭 '대정 몽생이'는 순치되지 않는, 야생마 같은 기백을 두고 붙여진 것이 아닐까.
 
제주도 인구 28만명이던 당시 3만여명이 희생을 당한 한국현대사 최대의 비극 4.3이 발발 직후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4.28 평화회담'의 현장을 찾았다.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구억국민학교 옛 터. 당시 무장대와 군 수뇌부 사이의 긴장은 물론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모두 사라진 채 '옛 배움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학교 초입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 지금은 옹기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역사적인 '4.28 평화협상'의 현장으로 알려진 구억국민학교 자리에는 옹기박물관이 들어섰다.

이 곳은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상이 열린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익렬이 해임 직후 <국제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협상을 "어느 민가"에서 열었다고 기록한 자료가 최근 발굴됐다.)  20대의 두 청년이 목숨을 걸고 벌인 담판에서 양쪽은 "72시간 내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곧바로 무력진압을 결정한 미군정 사령과 하지에 의해 무시되고 말았다.
 
평화협상이 파기된 결정적인 사건은 협상 사흘 뒤인 5월 1일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이었다. 우익 청년 등에 의해 저질러진 방화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됐고, 미군이 상공에서 불타는 마을을 촬영해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제목의 영상기록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사태는 긴박하게 전개됐다. 5월 5일 제주에서 미군정 수뇌부가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한 경무부장 조병옥과 선무귀순 공작을 역설한 김익렬 연대장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김익렬은 문책 해임되고 다음날 박진경 중령으로 연대장이 교체됐다. 제주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4.3 당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사람도, 가축도, 집마저 불살라져 사라져 버린 마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어린 아이가 춤을 추는 모양이라고 해서 '무동이왓'으로도 불리는 이름답게 평화롭기 그지 없었을 마을은 4.3 당시 130가구가 살았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대나무가 많아 탕건(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갓 아래 받쳐 쓰던 관), 망건(상투를 틀고 머리를 단정히 매던 머리띠 처럼 생긴 그물), 양태(갓의 밑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된 부분), 차롱(음식을 보관하는 대바구니) 등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의 주산지였던 이 곳에는 아직도 곳곳에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야트막한 돌담 안으로 볕이 잘 드는 지점에는 초가집이 있었을 것이다. 집 뒤로 돌담을 따라 빙둘러 서 있는 대숲은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좁지 않은 텃밭에는 각종 채소가 싱그럽게 돋아나 있었을 것이다. 돌담이 끊겨 있어 이 집의 가족들이 출입했을 것으로 보이는 곳에는 정낭이 걸쳐져 있었을 것이다. 마을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상상할 뿐.

 

4.3 당시 중산간 마을은 모두 불태워졌다. 돌담만 남아있는 집터에선 어떤 흔적도 찾을 길 없다.

이곳 무등이왓은 1862년에 발생한 농민항쟁의 장두 강제검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주도내 중산간지역에서는 18세기 이후 화전을 몰래 일구어 경작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불법적이던 화전 경작에 화전세를 붙이고, 목장에서도 세금을 거두면서 지방관아 재정에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들어 세금은 수탈의 수단이 되었다. 과도한 화전세와 목장전은 마침내 민란을 불렀다. '강제검의 난'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1898년에는 역시 지나친 조세 수탈에 저항한 '방성칠 난'이 일어났다. 갑오농민전쟁 이후 관군을 피해 제주에 숨어 들어와 살던 이들 중 한 사람인 방성칠은 이곳으로 옮겨와 화전을 일궜다. 방성칠은 원성 높은 이 일대 화전민과 가난한 농민들의 장두로 난을 일으켜 제주성을 점령하고 제주목사는 부상을 당한 채 달아나기도 했으나 한달여 만에 진압돼 처형당했다.
 
1901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복잡한 성격을 띄고 있다. 배경에는 역시 조세문제가 있었다. 고종이 근대적 개혁이란 명목으로 지방재정을 전부 중앙 재정에 편입시켜 일원화했다. 그동안 지방의 수령과 향리 등이 징수하던 세금을 왕실에서 봉세관을 파견해 직접 거두어 들인 것이다. 제주도에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은 전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지역의 3배에 해당하는 과중한 세금을 매겼다. 세금 징수 업무를 장악한 봉세관의 지위는 실질적으로 제주목사보다 우위에 있었다.
 
한편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을 맺은 뒤 천주교는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됐다. 거기다 조정에서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해 특별히 우대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신부들은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면서 포교활동을 벌였고, 이러다 보니 천주교의 특권을 이용할 목적으로 교인이 되는 불량배도 많아졌다. 이런 불량한 천주교인들을 봉세관 강봉헌이 세금을 걷는 마름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가축 나무 계란에까지 세금을 매겼다.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도민들은 민회를 열고 제주성으로 찾아가 봉세관의 지나친 세금징수와 천주교인들의 행패를 시정해 줄 것을 제주목사와 봉세관에게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와 교인들은 이 민회를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민회가 열리는 장소를 습격했다. 천주교인들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도민들의 온건한 평화적 항의는 무력투쟁으로 급선회했다. 
 
민군은 제주도의 동쪽과 서쪽에서 제주성을 향해 동진과 서진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대정 관아의 말단 관리였던 이재수는 대정군수 채구석을 수행해 천주교당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체 검안 과정을 목격하게 되면서 민란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다가 서진을 이끌던 오대현이 붙잡히자 서진의 장두로 나섰다.

 

이재수 생가 터 앞의 '드레물'. 대정에 하나밖에 없던 이 못은 명관이 추대되면 물이 말랐다가도   솟아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추대되면 물이 말라버렸다고 한다. 이재수도 이 물을 마셨을 것이다.

강우백이 이끄는 동진과 이재수의 서진은 제주성 남문 밖 황사평에 진을 치고 프랑스 신부가 지휘하는 제주성내 무장교인들과 대치했다. 10여일 동안 공방을 벌이던 민군은 식량과 땔감이 떨어진 제주성 주민들의 봉기로 성문이 열리자 제주성으로 진입해 천주교인 309명을 처형했다. 프랑스 함대와 중앙정부의 군대가 파견돼 민란은 진압되고 세 장두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은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을 당했다. 제주도 3개 군의 도민들은 프랑스 공사가 교회의 피해 배상금으로 요구한 6,300여원을 부담해야 했다.
 
이재수는 제주성을 함락한 뒤 "서양 사람을 쳐 없애고 제주성을 회복했다"고 말했고 최후진술에서는 "우리가 죽인 것은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는 말로 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급관리이던 그가 민란의 장두로 죽음의 길을 자청해 나선 데 대해 도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다. 이재수 난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던 1961년 대정지역 유지들이 민란의 장두 세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대정청년회가 대정성 앞에 세운 비석. 30여년 전 이곳 유지들이 세웠던 비는 새 비석 아래 묻혔다.

민란의 땅 모슬포를 뒤로 하고 김성숙 선생의 고향 가파도로 향했다. 모슬포항에서 5.5km, 뱃길로 20분 거리의 가파도는 태평양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상동항에 내려 해안을 따라 가는 동안 보이는 바위들은 제주도 전역을 뒤덮고 있는 현무암이 아니었다. '조면안산암'이다.
 
용암이 흐르면서 굳어 만들어지는 암석들은 마그마의 화학성분에 따라 현무암, 조면암,조면안산암 등으로 달라진다. 가파도의 바위와 돌멩이들은 산방산, 백록담 정상, 영실 일대의 바위와 같은 암석들이다. 집담이나 밭담도 그래서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아니다. 동글동글하고 표면이 거칠지 않아 담을 한 줄로 쌓기가 현무암보다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납작납작하게 생긴 게 그나마 다행이다.

 

 
 
조면안산암으로 이루어진 해안과 돌담. 이 암석은 풍화하면서 표면이 또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회을(悔乙)  김성숙 선생이 설립한 '신유의숙'의 후신 가파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18만평의 청보리밭이 풍기는 싱그러움과 초록빛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청보리밭 산책로' 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은 돌담을 경계로 초록빛 물결이 가득한 청보리밭과 돌담 밖 길가의 유채꽃이 조화롭다. 그런데 이 길을 '예쁘게' 포장해놓을 착상은 어디서 얻을 걸까. 그리 넓지 않은 흙길에 부드러운 잡초가 드문드문 깔려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있~어 발을 멈~춘다' '보리밭 사잇길'은 가곡 '보리밭'을 부르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김성숙 선생은 해방 후 김구,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 참석했던 거물이다. 대정소학교를 거쳐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3.1만세운동으로 구속됐다. 학교마저 퇴학당한 뒤 고향 가파도로 돌아와 1921년 '신유의숙'을 설립하고 당대 도내의 민족주의자들을 초빙해 제자들을 길러냈다. 신유의숙 덕에 당시 가파도에는 문맹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김성숙은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면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김성숙은 4.19혁명 직후 한국사회당 후보로 총선에 나서 제주도 3개 선거구에서 최고 득표로 자유당 출신의 현오봉을 누르고 민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 시절 4.3진상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진보정당을 창당하기도 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뚜렷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가파초등학교 옆 '회을(悔乙)공원'에 세워진 설립자 김성숙 선생 동상. 동상 받침대에는 김성숙이 지은 '신유의숙' 교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역사학자 박찬식 박사가 가파도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가파도나 마라도는 모두 화산폭발로 생긴 섬인 것은 같지만 마라도는 독립화산체인 반면, 가파도는 제주 본섬의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가파도가 1842년 흑우를 기르기 위한 국유목장이 되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한때 주민이 1천여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180여명이 살고 있다.
 
가파도 주변 해역에는 물살이 세 미역도 실하고 고기들도 맛이 있다. "물살이 거센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거세, 고등학교 시절 이곳에 놀러 왔다가 실컷 두들겨 맞고 돌아갔다"는 일행의 증언을 믿을 수 없을만큼 인심이 좋다. 식당에서 해삼을 주문했더니 미역과 모자반을 수북하게 내어놓는다. 항구 대합실 앞에서 미역과 모자반을 파는 해녀 할머니도 비닐봉투가 터져라 미역을 담아준다.
 
해발 18~22m로 평평한 이 섬에는 자그마한 언덕도, 그럴 듯해 보이는 나무도 없다. 바람의 흐름을 막을 구조물도 없어 얼마 전 이 섬에 풍황측량기가 세워졌다. 거의 해상풍력 수준의 질높은 발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을 터이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고인돌로 추정되는 135기의 바위들이 최근 고인돌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는 점이다. 패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BC 100년에서 AD 200년 사이 인류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바위들이 고인돌일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문가들의 판단은 다른 모양이다. 
 
섬 중의 섬 가파도는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김성숙 외에도, 상해 임정에 군자금 송금활동을 벌였던 의사이자 사회사업가, 여성운동가 고수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한정, 이도일, 향토사학자 김태능 등이다. 5월 6일부터는 이곳에서 청보리축제가 열린다. 이곳을 찾는 외지인들은 섬 가득 초록으로 덮인 이국적인 모습을 한껏 즐길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이 낳은 인물들이 꾸었던 민족독립의 꿈도 함께 만날 수 있을까.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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